혼란한 시기가 끝나갈 무렵 전란의 강자 2명이 남았는데 그들이 바로 원소와 조조였다.
이들은 어릴적 친구였기에 우호적 관계에 있었고 둘 중 원소가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하지만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면서 둘 사이가 멀어짐. 이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원소가 먼저 조조를 공격할 계획을 세움.
충신 저수가 여러 전투로 인해 국력이 피폐해졌고 백성들이 힘들어 하는 이 시기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충언하였으나 원소는 무시하였다.
원소가 이끄는 군대는 수로를 확보하고 있어서 보급 수송이 유리하였다. 이에 반해 조조군은 육로를 이용해야 했기에 보급소송이 불리하였다. 그 뿐 아니라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조군은 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역사속에서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원소군은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관도성을 포위하고 흙산과 고층망루, 땅굴 등을 파면서 다양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투석기 등을 활용한 조조군도 만만치 않았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보급이 어려웠던 조조군은 식량이 다 떨어져 갔다.
조조는 식량을 보급받기 위해 특사를 보냈으나 원소의 부하 허유에게 붙잡히고 이를 꿰뚫어 본 허유는 조조의 식량이 거의 바닥났을 때 조조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원소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원소는 오히려 허유가 조조의 스파이인 것으로 의심한다.
이에 실망한 허유는 조조에게로 갔고 조조는 천하를 얻게 되었다고 기뻐한다. 그리고 바로 허유의 정보를 이용하여 조조는 직접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식량창고인 오소를 습격하여 획득하였다.
또 원소는 참모가 군사적 우위를 활용하여 일부를 조조의 후방으로 보내 기습하자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자신의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면서 묵살하였다. 이 뿐 아니라 원소의 참모 곽도는 고람과 장합을 모함하였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고람과 장합은 조조군을 공격하러 가는 척하다 항복하고 조조군에 합류하여 8만의 원소군을 물리치는데 앞장 선다. 1만 명의 조조 군대에게 10만의 군대는 거의 전멸하였고 원소는 2년 후 병들어 죽고 말았다. 이 전투가 위나라의 초석이 되었다.
한 명의 지도자의 판단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 전투였다.
사실 한국인들은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조상이 있기에 가슴깊이 느끼며 살아왔다.
단 한 사람이 나라를 구한다? 물론 이순신 장군을 따르던 수많은 병사들과 이름도 남기지 못한 이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들이 이순신 없이 함께 전쟁을 해서 이길 수 있었을까? 이름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힘을 모아 싸운 많은 이들을 결코 잊지는 말아야겠지만 이순신, 그 한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 한국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교병필패(驕兵必敗) :교만한 군사는 반드시 패한다.
환관이었던 조숭의 아들 조등의 양자였던 조조. 이에 비해 원소는 명문집안이었기에 중국 전역의 지지기반에서 우위.
이러한 개인적인 신분의 우월감 뿐 아니라 8만이라는 전력의 우위 속에서 자만에 빠진 원소군은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혼란한 시기가 끝나갈 무렵 전란의 강자 2명이 남았는데 그들이 바로 원소와 조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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