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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리뷰

쇼펜하우어 VS 니체(4장) : 윤리학

by onyuan 2023.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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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쇼펜하우어의 윤리학

1) 칸트윤리학 비판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윤리학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정언명령을 바탕으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윤리적인 도식을 제공하는 칸트의 시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칸트가 말하는 당위적인 윤리학은 공허한 것이며 실제로 인간의 삶에서 실행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칸트는 도덕규범의 보편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윤리 규범은 개인이 처한 특정한 상황을 고려해서는 안 되고 어떤 경우에도 통용되는 보편타당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정언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세가지 전제가 필요한데 먼저 의지의 자유를 언급합니다. 한 사람의 행위가 도덕적일 수 있으려면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이러한 생각은 신학적인 도덕과 십계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영혼의 불명성과 신의 존재를 언급한다. 신이 존재하고 명령을 내렸기에 우리는 도덕규범을 수행해야 하며 신의 존재는 곧 영혼의 불멸을 의미하기에 인간은 인생을 사는 동안 정언명령을 잘 지켜 영원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근대부터 현대까지에 이르는 철학 연구가 칸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철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이지만 유럽을 지배했던 기독교의 영향으로 신의 존재를 배제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첫 번째 전제, 의지의 자유 즉 자율적으로 실천이성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습니다. 인간의 본능은 도덕규범을 수행하려는 의지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인간과 본성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인간이 불멸의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표상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의 유한함을 주장하며 영원불멸한 영혼의 존재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전제인 신의 존재를 상정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종교는 인간의 유한성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종교가 생긴 것이기에 신의 존재를 부인하였고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요구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상정한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완전한 존재, 절대적인 존재의 신은 유한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절박한 인간이 생각해 낸 것이기 때문에 신에 의해서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와 구원이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을 비판하였습니다.

 

2) 인간의 자유의지

  윤리학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요한 쟁점 중 하나입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대로 살아가고 선택한다면 인간의 도덕 행위의 결과는 전적으로 한 개인, 인간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의 문제는 쇼펜하우어게게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칸트는 현상세계는 필연성이 지배하지만 도덕의 세계는 자유가 지배한다고 보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반박하였습니다. 모든 존재는 살려는 의지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개체의 삶은 살려는 의지의 지배 속에서 행동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쇼펜하우어도 인간이 동물과는 달리 의지가 여러 가지 행동의 동기륻 중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이러한 선택 결정이 자유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선택 이전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고 그 의지에 의해 선택되기 때문입니다. 의지는 최초이자 모든 개체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근원이기에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아주 한정된 영역 안에서만 자유하며 자유로운 것 같지만 강력한 의지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며 자신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넓은 시야로 인간의 삶을 내려다 보면 정말 자유롭게 사는 영역은 지극히 한정적입니다. 우선 태어나는 시기와 장소, 환경, 자신의 모습 등 그 어떠한 것도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며 태어난 국가가 정한 규제와 규범 테두리 안에서만 살아가야 하며 사회문화와 통념, 가치관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생존해야 하는 강력한 의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동에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 상황의 한계 때문에 먼지보다 작은 지구라는 행성조차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병에 신음하고 전쟁과 자연재해, 온갖 사고로 인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인생을 끝내기도 합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정치적 상황에 휩쓸려 우리의 자유는 허상에 불과해 지기도 합니다. 이런 외부적인 요인들 외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한계, 즉 지능이나 뇌의 기능의 한계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 신체적 한계로 인해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쇼펜하우어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되며 오히려 소리없이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주목 받지 못한 상황속에서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깊은 성찰과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 판단되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잘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인간의 이기적 본성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또 하나의 걸림돌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이기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살려는 의지로 인해 다른 개체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기적인 본성은 교육이나 사회적 규제를 통해 쉽게 제어할 수 없으며 변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며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적대시하는 대상을 절멸시키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자기중심적인 것을 기본 원치으로 삼고 살려는 의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래서 언제나 세계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자신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봅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무한한 세계에서 전적으로 보잘것없고 무로 축소되는 모든 개체는 그럼에도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삼고 자신의 존재와 안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희생할 용의가 있으며 세계도 멸망시킬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타인의 죽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지만 자신의 죽음은 세계의 종말로 간주한다... 자신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남이 가지고 있으면 빼앗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안락함을 아주 조금 증가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삶 전체를 파괴하는 일을 자주 일으킨다."며 인간의 이기심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그리하여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윤리학에서 이기주의의 극복을 우선적인 목표로 제시합니다. 인간의 삶을 염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 때문입니다. 여기서 염세주의란 비관주의라고도 하는데 세계나 인생을 불행하고 비참한 것으로 보며, 개혁이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이나 태도를 말합니다.

  인간은 비관주의를 경계하며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자신을 알면 알수록 이기적인 본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며 현재의 세상도 성공한 자, 권력을 잡은 자, 경쟁에서 이겨낸 자들이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끼리 소통하고 소비하고 즐기며 살아갑니다. 각종 질환에 걸린 사람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 누군가와의 경쟁에서 진 사람들 그리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딘가에 갇혀 살아가기에 잘 보이지 않으며 그들은 세상에서 배제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사회 환경은 이기적 본성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누가 세상을 희망적으로 보고 싶지 않으며 우리의 삶이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세계를 비관적으로 보고 싶지 않지 않지만 아프고 가리고 싶은 것을 펼쳐 정확하게 보면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분명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쇼펜하우어가 냉정하고 날카롭고 정직하게 인간을 간파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4) 동정심의 윤리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동정심의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정심은 도덕적인 규범이나 명령이 아니라 세계의 본질과 삶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에서 비로소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동정심은 자신의 삶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근원적인 통찰 그리고 타인의 존재가 처한 운명적인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공감에서 생겨납니다. 또한 동정심은 인간의 삶의 원리가 야기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동정심은 칸트가 말하는 단순한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주의의 극복에서 시작되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존재를 보고 동정심이 생기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의 처지와 자신도 그런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슬픔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무기력함과 자신도 얼마 살지 못함을 아는 유한성을 느끼게 되어 함께 슬퍼하고 고통을 전달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정심이 일종의 사랑이라는 점까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눈물이 없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동정심을 가질 수 없으며 동정심은 분명 자기애,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편 47장에서 동정심을 모든 존재의 형이상학적 동일성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동정심은 전체를 인식하고 본질을 파악하며 인류와 세계에 관심을 가집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행동 원칙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정의의 원칙, 다른 사람에게 부당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사랑의 원칙, 네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인류, 존재 전체에 대한 동정심은 후천적으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마음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 또한 어렵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기심과 악함을 지니고 있으며 쉽게 습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동정심을 완전히 자신의 삶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기적인 의지, 자신이 살려는 의지를 부정하며 손해와 피해, 희생을 강요해야 가능하므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정심은 인간의 무기력함, 유한함, 삶의 고통을 견디게 하며 존재하는 모든 개체가 이기적으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나아가는 세계 안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부여하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어 줍니다. 

  인류와 세계,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들이 있어 미소짓게 되고 그들이 있어 희망을 봅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정말 잘 파악한 것 같습니다. 이기주의적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지만 그 중 분명 정의를 위해 살아가고 인간애를 발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정확한 지적을 하는데 이런 성품,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디쯤에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쉽게 얻어지지 않는 동정심, 정의와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우리 작은 노력을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2. 니체의 윤리학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기본적인 철학 '살려는 의지(will to live)'와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살려는 의지는 앞의 내용을 통해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해석이 좀 어색한데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하고 그 이상이 되고자 하며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작용으로 정의합니다. 자신이 더 나은 인간, 보편적인 것 그 이상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바로 그 힘을 향하는 의지정도로 해석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스스로 고귀한 생각을하고 행동할 수 있는 초인이 되길 바란다고 말하는데 모든 것을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초인적인 힘에 의해 발현되는 의지가 니체의 철학적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모든 면에서 경쟁을 하며 살아가고 그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숙명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초인적인 힘에 의한 의지'를 두고 강자의 지배논리를 옹호한다는 오해를 하기도 하는데, 니체의 '힘에 의한, 힘을 향한 의지'는 '누군가가 약자를 넘어서려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며, 엄밀히 말하면 '누군가가 자신보다 더 강한 자를 넘어서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한 자는 강한 사람을 뜻한다기 보다 사상과 철학, 정치-사회이념입니다. 즉 '힘에 의한, 힘을 향한 의지'란 '강한 것, 지배해온 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기는 고통은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기 때문에 고통을 즐겁게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힘을 마음껏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나 자신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상대방이 강하다는 뜻이므로, 그 강한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고통은 니체에게 있어서 '힘에 의한, 힘을 향한 의지'를 향한 도전은 즐거운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사유의 고통, 숙고함의 즐거움을 느꼈기에 모든 철학의 근원까지 파헤쳐 보려고 시도한 것 같으며 그 힘이 이런 면에서 발휘된 것 같습니다. 니체는 그렇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자를 깎아내리라는 뜻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뛰어넘고자 하는 강자의 그 무엇은 나를 계속해서 자극시키고 발전시키는 선의의 파트너가 되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즉, 니체는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강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를 넘어서려고 하는 의지'를 옹호한 것입니다. 

 

1) 칸트 윤리학 비판

  니체는 항상 모든 철학의 근원부터 다시 고민하고 사유합니다. 윤리와 도덕에서도 그의 이러한 사고는 이어집니다. 기존의 도덕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도덕의 가치에 긍정하는 것일 뿐 누구도 도덕의 기원에 대한 진정한 논의를 시도하거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지적합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누구도 해치지 말라는 정의로운 도덕,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도우라는 인간사랑의 명제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그는 '힘에 의한, 힘을 향한 의지'를 본질로 하는 이 세계 속에서 이 명제는 무미건조한 거짓이며 감상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도덕의 근원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기존의 내용을 발췌하고 요약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니체는 칸트가 인간은 선을 추구하는 의지가 있다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선을 추구하는 의지가 인간의 본응에 자리하고 있다면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과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힘에 의한, 힘을 향한 의지'가 인간의 모든 행위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정언명령의 보편성에도 비판을 가합니다.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니체가 추구하는 자유로운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행동에 대해 서로 다른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는 것을 칸트가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어느 곳에서는 선일 수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악행이라고 판단되기도 하기 때문에 인간의 개별 행동을 보편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이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의무를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오히려 개인의 삶을 구속하려는 종교와 도덕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라는 개념 역시 종교와 도덕이 만들어낸 장치라는 것입니다. 

 

2) 도덕의 기원

   니체는 기독교가 만들어낸 도덕규범들은 철저하게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피안의 세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고 보았으며 전통철학이 제시한 도덕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하면서 도덕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합니다. 

  니체가 우선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선과 악이라는 개념입니다. 선의 기원은 나에게 이로운 것, 몇 번 이익을 주는 것 그 자체를 우호적이고 선한 것으로 여겼고 나에게 해가 되거나 불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을 적대적인 악으로 규정한 기원에 대해 통탄해 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과 기원이 자신의 유익함, 유용성에 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종교지도자들과 전통철학자들은 이를 도덕이라고 규정하고 선과 악의 개념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고귀함, 선함, 좋음을 간직한 사람은 나쁨과 악으로 어떤 대상이나 행동을 미워하거나 비난하고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선은 악과의 대립이 애초에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선과 악의 대립이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이유에 대해 니체는 원한감정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선은 악에게 원한을 품었고 악은 선에게 원한을 품어 서로가 끊임없이 대립해 온 것입니다. 인간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등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양은 선한 대상이고 이를 해치고 잡아 먹어 피해를 끼치는 늑대나 육식동물은 악한 대상이 되어 온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내 편이면 선하고 나와 대립하는 이들이면 악으로 규정하며 살아온 인간의 역사 속에서 니체는 인간의 유익에 따라 선과 악을 규정한 도덕이 어떻게 확고한 원리이자 섭리가 될 수 있는지 오히려 반문합니다.

  그리고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만든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신이 인간의 죄 때문에 자신을 희생했다는 주장을 통해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을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히게 하여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힌 사람들 중에는 소름끼칠 정도의 자기 고문을 스스로에게 행하며 살았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지 않았다면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도덕과 윤리, 선과 악이 우주에 존재하기는 할까요? 인간이 살아가고 있어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발생하는 지구의 변화, 그리고 항성들의 폭발과 블랙홀... 다른 새의 알들을 밀어내고 자신의 알을 낳아 대신 키우게 하는 뻐꾸기를 우리는 악한 존재로 봐야 할까요?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혹은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도덕과 윤리는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곳에서 불편한 감정이 드는 일들을 서로가 하지 못하도록 규제해야 그 공동체가 지속가능하기에 약속하고 통제하려는 것 뿐일까요? 저 어디엔가 절대적인 선이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내재된 것이라면 니체의 말대로 그 선은 결코 원한의 감정을 가질 수 없기에 악이라고 하는 대상을 만들 수가 없으며 모든 현상을 선으로만 바라볼 것입니다. 니체의 말대로 선함과 악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공동체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좋은 지 알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원하는 행동과 말을 하기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어떠한 명령도 받지 않았고 반드시 모두가 원하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시대가 원하는 삶, 따뜻한 정을 나누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소 띤 얼굴로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시키는 행위가 절대적인 선, 상을 받거나 큰 혜택을 받는 행위가 아니더라도 인간이기에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필요로 한다면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3)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니체는 도덕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바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입니다. 주인도덕은 고귀한 인간이 지닌 도덕,  즉 자신이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인도덕을 가진 이들은 스스로 도덕의 가치를 창조하고 고도로 긴장된 행복과 나누고 베푸는 부유한 의식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을 가지고 기꺼이 자신에 대해 준엄하고 엄격하며 타인을 도울 때 동정심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의 영예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쇼펜하우어의 동정심은 자칫 잘못하면 타인의 존재에 대한 평가절하와 자신의 우월감으로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뛰어넘는 것이 주인도덕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동정심은 타인의 존재를 훼손할 위험이 있음을 강조하며 주인도덕은 타인을 존경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동정을 구하지 않으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과 대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도덕의 의무를 다른 누군가에게 미루거나 전가하지 않으며 도덕적 행동에 한계도 설정해 놓지 않습니다. 모든 가치의 절대성, 보편성을 부정하고 상대성을 인정하며 다양성을 수용하여 이기적인 도덕, 자신에게 유익한 도덕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향한 도덕을 실천합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삶과 행동을 통해서도 '힘을 향한 의지'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노예도덕은 인간의 삶에 대해 염세주의적인 해석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현실세계의 삶이 전적으로 고통스럽고 비관적이기 때문에 고귀한 가치로 향하는 힘의 의지를 발현할 수 없으며 긍정적인 가치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도덕에 의지하여 스스로가 가치의 입법자가 되지 못하며 따뜻한 마음, 인내, 근면, 동정심, 친절 정도를 칭송합니다. 게다가 노예도덕은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 선과 악의 대립의 이분법을 만들어 모든 삶을 관통하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원한감정을 극대화 시키고 선하다고 판단되는 행동을 의무감으로 하면서 악으로 판단되는 행동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비난하며 살아갑니다.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이 진정한 그 사람의 모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도덕, 즉 주인도덕에 이 말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과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도덕을 배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피하도록 노력하고 해야 할 일들은 하려고 노력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도덕의 근원과 도덕적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겨우 법을 어기지는 않는 삶,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 삶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선한 마음, 동정심에 휩싸여 봉사활동을 하며 스스로 위로도 받고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받기를 기대합니다. 불쌍하게 여기고 안타깝게 여기는 동정심 저 아래에 상대를 평가하고 나를 높은 위치에 두는 마음이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선한 미소를 장착하고 선하다고 판단되는 일을 합니다. 때론 엄청난 대가를 기대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위선을 떨기도 합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살펴보면 종교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가 주장하는 바대로 살기 위해, 그러니까 수동적으로 그 가르침에 순종하여 능동적인 선택이 아니어도 해야할 숙명으로 여기고 도덕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가르침까지도 근접하지 못한 삶을 살지만 그 이상을 상상해 보지도 않으며 그 한계까지를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런 인생은 능동적으로 선택한 삶이 아니었으니 고된 삶이었을 것이며 고난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쉽게 선택하지 않은 삶을 인내해 냈으니 반드시 그 대가가 차고 넘치길 기대합니다. 게다가 종교가 주는 공포와 두려움, 협박에 의해 수동적인 도덕적 삶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한 도덕적 고귀함을 갖추고 본능을 뛰어넘어 한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도덕적 삶을 살고 가치를 창조하라는 니체의 외침에 심장이 뛰고 마음이 열립니다.

  니체를 통해서 도덕적인 삶을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어 정말 기쁘며 부족한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깊은 생각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4)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

  니체가 사용한 단어인데 거리는 간격이며 파토스는 충동, 정열 등으로 번역되며 무언가를 받은 상태, 수동적 상태를 말하는 라틴어 파시오(passio)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힘에 의한, 힘을 향한 의지'에 대해 니체는 '파토스'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입니다. 존재나 생성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비철학적인 용어이지만 이 용어에는 니체의 고민이 들어있습다. 힘에의 의지가 의지 작용이자 충동 작용이며 아펙트라는 것, 그리고 힘에의 의지의 활동은 경험적 사실이라는 것을 기존의 철학적 용어는 적합하게 설명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니체로 하여금 파토스라는 용어를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강한 것과 약한 것, 위대함과 비소()함, 고귀함과 저열()함 등에 따라서 인간의 유형을 둘로 나눌 때, 이들 속의 전자()가 후자()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후자와 거리를 두면서 자기 자신을 지켜 나가고자 하는 니체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 인류의 향상도 기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힘에의 의지는 존재도 아니고 생성도 아니다. 오히려 파토스가 가장 원초적 사실이며, 이것으로부터 비로소 생성과 작용이 발생한다." 고 말했습니다.

  거리의 파토스라는 표현은 니체가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니체의 철학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 용어입니다. 니체는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서 서로 다른 해석과 경험을 존중하고 자신의 고유한 삶을 지키고 표현해 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평등하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기에 각자의 고유한 성질과 특성이 존재하며 이것은 서로 혼합시킬 수도 없으며 혼합되어 평등해질 수도 없기에 일정한 거리두기는 필요하며 이를 통해 이상적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거리의 파토스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창출하고자 하는 마음과 열정을 간직하라는 니체의 부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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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온유안 작가의

우리는 누구인가요? 이 근원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한 인류...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양을 도는 아주 작은 우주 별, 지구에 태어난 우리. 그 사는 이야기, 또는 삶을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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