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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리뷰

쇼펜하우어 VS 니체 (5장) : 형이상학 / 니체를 너무 늦게 만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by onyuan 2023.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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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Metaphysics)

 

1) 염세주의

쇼펜하우어는 형이상학을 전통 철학자들처럼 학문으로서 접근을 하지 않고 학문의 근거인 인간의 삶과 세계경험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는 학문이 끝나는 곳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말하며 현상 자체에만 주목하지 않고 인간의 삶과 세계의 근원을 파악하려는데 집중하였습니다.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근원적인 것, 즉 의지의 본질과 그러한 의지의 존재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의 출발점입니다.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해 낙관적이었던 철학적 분위기 속에서 쇼펜하우어는 전혀 반대의 염세주의적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가 아버지와의 유럽 여행에서 보고 경험한 것은 고통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으며 이 경험은 그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온 세계는 우연과 오류로 가득차 있으며 인간은 지속적인 갈등과 대립 속에 내던져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모든 개체는 각자의 의지에 의해 충동적이고 맹목적인 갈등을 야기하며 살아가고 그로 인한 불완전한 상황은 해소될 수 없어 삶이 고통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궁극적으로 제시하려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개체는 갈등 속에서 살아가다가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성과 갈등상태에 놓인 것을 주목합니다. 모든 개체의 삶과 세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유한하며 불안정한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성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찰로 인해 인간이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지 숙고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통해 인간의 삶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유한한 우리의 삶을 똑바로 인식하고 오히려 유한한 삶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바라는 그의 염세주의인 것입니다. 삶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성찰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으며 이것이 그의 형이상학의 근간이 되는 특징입니다.

 

2) 살려는 의지와 고통

살려는 의지는 쇼펜하우어 철학의 근원이며 모든 존재는 이 의지를 통해 살아가고 의지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체는 충동적이고 맹목적인 살려는 의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이 모든 세계는 전적으로 이 의지가 드러난 결과물이며 모든 형태의 삶은 의지의 맹목성과 충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살려는 의지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다보니 인간과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인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의 문제, 삶 속에서 우리가 직면한 직접적인 현상에 주목합니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은 고통속에 내던져진 존재들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살려는 의지의 입장은 어떨까요? 그들에서는 개체들의 유한성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러냈던 개체가 종말을 맞이하면 또 다른 새로운 개체를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의지에게 개체는 의미가 없으며 오직 살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을 드러내줄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개체의 유한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더욱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으며 원치 않는 고통의 환경, 즉 각자의 생존을 위해 다는 존재에게 고통을 전가해야 하는 갈등상태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사유할 능력이 있는 존재는 그렇지 못한 존재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고통은 현재에 머물지만 정신적 고통은 과거와 현재, 다가올 미래까지도 한 존재를 삼켜버립니다. 인간은 죽은 뒤에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불안해 하며 소멸될까봐 걱정하고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런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개체의 죽음은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의식까지도 소멸시켜 버리기 때문에 어떤 고통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죽음은 개체성이 잊혀지는 잠으로 표현합니다.

 

3) 고통의 극복과 이념조망

인간과 모든 존재가 고통 속에서 태어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런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쇼펜하우어는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바로 예술을 통해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예술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하며 이를 통해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언제나 변하지 않는 이념으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념은 의지의 객관화 과정에서 다양한 개체들의 존재를 가능케하는 사다리의 역할을 하며 의지는 아니지만 의지와 동일하게 인간을 지배하여 고통을 잊고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념은 의지와 표상 사이에 위치해 비본질적이지만 인간 개인에게는 실재성을 지닙니다. 이념이 예술과 결합하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를 멈추게 하고 서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것을 중지시키고 고통스러운 존재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킵니다. 그 결과 의지의 지배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쇼펜하우어는 예술은 개체를 담아내고 그것들을 표현하지만 예술의 진정한 대상은 신, 자연, 개체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예술의 유일한 기원은 이념을 인식하는 것이고 유일한 목적은 이러한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훌륭한 예술은 감성과 오성이 받는 직관적인 개념들을 압도해 버리며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아는 것에 대한 욕망이 인간의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제시해 주는 것처럼 인간이 처한 여러 고통의 상황들을 뛰어넘어 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 앞에 인간이 압도되어 모든 근심과 걱정, 고통 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비유하며 인간이 이념속으로 빠져들 때 의지로서의 세계는 잠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이 순간은 지속되지 않고 일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인간은 다시 불안을 느끼고 현실을 직시하며 고통 속에 거하게 됩니다. 이 굴레의 반복이 인간이 처한 상황이며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을 고통으로 보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금욕주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염세주의는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하는 특징을 가지는데 그 방법 중 하나로 금욕이라는 방식을 제시합니다. 금욕은 그의 철학적 염세주의에서 주어진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고통을 거부하기 위한 시도가 바로 금욕인 것입니다. 맹목적인 생존의 의지에 사로잡힌 삶에 대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것이기에 결코 삶의 포기나 도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금욕은 삶의 근원에 대한 성찰을 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고귀한 행위이며 이를 수행하는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고통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면서 살아야 하기에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나 은혜를 통해서 벗어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금욕을 통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어떻게 모든 종교에 종교인들이 은둔자, 순교자, 성직자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특정 개체, 즉 해, 달, 산, 동물 등을 믿는 종교인들에게서도 이런 행동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쇼펜하우어는 인간 스스로가 금욕을 선택해서 실천하여 살려는 의지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몸을 극복할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개체 유지와 종족 번식, 자신을 표현하려는 의지인데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현존을 부정하고 해를 가하며 고통을 주는 행위를 서슴치 않는 것입니다. 다른 개체들의 존재마저 부정하며 자신의 살려는 의지를 강화시킵니다. 살려는 의지는 모든 다른 개체와의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금욕은 단지 몸 자체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의해 나타나는 의지의 현상들을 극복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쇼펜하우어는 금욕이 이러한 개체들 간의 갈등을 극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금욕을 하는 사람은 전체를 인식하고 온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며 모든 존재는 소멸하고 헛된 노력을 이어가며 내적인 투쟁과 지속적인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통 받는 인류와 모든 개체, 그리고 사라져 가는 세상을 봅니다. 순간적인 쾌락과 안녕이 가져오는 위로에 의지하거나 이를 추구하지 않고 세계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의지의 욕구들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이로 인해 그 어떤 비난과 모욕에도 무관심으로 대응할 수 있으며 상대의 배타적인 행위에도 자신을 부정하며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모든 종교는 간파하였고 삶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금욕을 실천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세상과 인간의 불완전한 상태와 삶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인식하여 실천하고 있습니다.

 

5) 의지의 부정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부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의지의 부정이란 세계 정복자가 아니라 세계극복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계극복자인 의지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흔들림 없는 평온한 세상, 깊은 평정, 내면적인 안락함의 세계입니다. 살려는 의지에 의해 발생하게 되는 모든 고통과 다른 개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를 멈추게 되므로 의지가 주는 근원적인 문제들에서 자유하게 되고 그 결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의지를 부정하는 방법을 두 가지 제시하는데 하나는 금욕이며 다른 하나는 고행입니다. 금욕의 길은 세상과 개체들의 원리를 통찰하여 단순하고 순수하게 인식된 고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의지를 극복해 나가는 것이며 고행의 길은 능동적으로 고통의 자리로 나아가 살려는 의지의 덧없음을 체험하여 극복하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금욕을 배의 돛에 비유하였고 고행을 배의 노에 비유하여 돛을 달고 노를 저어 인생을 항해하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이어질 고통처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그 숭고한 노력을 통해 이 세상이 주는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쇼펜하우어가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것에는 매우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살은 인간의 살려는 의지, 근원적 본성에 따르는 적극적인 행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의지에 이끌려 고통을 견뎌낼 의지를 발휘하지 않은 채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어리석고 무익한 행위라고 비판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 스스로도 고통의 삶에 형편없이 무너지는 것이며 한 사람의 자살은 그와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를 주장하여 삶이 허무하고 덧없는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것 같지만 그의 진심을 살펴보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결코 고통의 삶에게 지지말라고 강력한 응원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삶의 고통을 잊기 위해 각자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위로를 얻고 다시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쇼펜하우어가 제안하는 방법은 깊은 울림과 통찰을 주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자신 앞에 놓인 고통과 삶을 이겨내고 극복해 나가야 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이 주는 고통을 또 다른 고행의 수련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아시아의 여러 종교에서 널리 하고 있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모든 존재가 살려는 의지에 의해 움직이니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의지를 이겨내는 것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제시한 존재의 근원, 살려는 의지를 넘어서는 대안으로 자연스럽게 인간의 본성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금욕과 고행의 길을 스스로 가야 하는 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시도하여 고통의 삶을 극복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현대의 인간은 삶의 쳇바퀴에 갇혀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하며 자신의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 깊은 사유들,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배우고 경험하고 실천해 볼 기회도 가져보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이것보다 먹고 살아야할 문제가 좀 더 중요하기에 어린 시절부터 좀 더 안락한 삶과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직업을 찾아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인간, 유한한 삶도 안타까운데 주어진 삶의 시간은 우주의 시간과 비교해 지나치게 짧기까지 합니다. 그 짧은 순간의 삶의 시간마저도 행복보다는 고통의 시간을 많이 경험할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우리의 삶을 솔직하게 바라본 쇼펜하우어는 우리에게 어떻게든 희망과 용기와 길을 제시해 주려고 노력했으며 그의 마음이 그의 글들을 통해 잘 전해져 분명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줍니다. 살려는 의지, 생존 본능에 맥없이 무너지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의지, 나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의지를 지혜롭고 현명하게 발휘하여 모두가 더욱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길 바랍니다.

 

 

2. 니체의 형이상학

1) 가치의 가치전도

 

니체의 기백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자신이 탁월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식했던 것일까요? 어린 시절의 글에서도 "세상 사람들이여, 제발 나의 말을 들어보라."며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집필했으며 자신의 과제는 인류 최고의 자기성찰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세상의 우연들과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의 사제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질문들 제기하고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것을 얘기합니다. 니체는 인간이 생각해낸 모든 것의 근원을 깊이 고찰하여 그 사고의 근원을 파악해 낸 후 자신이 판단하기에 부족함이 보이거나 자신 스스로가 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모든 것을 재정립하고자 합니다. 하이데거 역시 니체철학의 중요한 목표는 새로운 가치정립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아주 흥미로운 사람이며 때론 명석한 그의 사고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니체의 형이상학의 특징을 잘 표현해 주는 용어가 있는데 바로 '가치전도'(Umwerthung)입니다. 니체의 가치전도란 기존의 모든 가치, 철학, 굳건하게 뿌리내린 사상들을 완전히 뒤집고 새롭게 고찰해보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논리, 도덕, 인식, 종교, 예술의 영역까지 폭넓게 살펴보며 그곳에서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을 가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전통철학, 서양철학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것을 이끌어온 동력은 무엇인지, 또한 전통철학과 서양철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진지하고 냉철하게 살펴보고 비판적 논의를 진솔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가치전도는 그가 강조한 신의 죽음, 초인, 힘에의(힘을 향한, 힘에 의한)의지, 영원회귀사상 등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개념을 통해 전통형이상학을 해체하고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제시합니다.

니체가 언급하는 가치전도는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이제까지 우리의 삶을 이끌어 왔던 가치의 기원이 정당한지를 진지하게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 온 것은 도덕과 종말, 사후세계에 대한 갈망이 지배해 왔는데 도덕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개체의 유익과 관련되어 있으며 종말과 사후세계, 즉 날조된 가상 세계는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었고 실존의 고통을 견뎌 내기 위한 아름다운 가상으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진정으로 인간이 자신의 참된 인생을 위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동안 쌓여온 모든 것들에 대한 가치전도가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치전도를 외친 니체의 목표는 인류에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을 제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인간적인 삶이란 무엇일까요? 니체가 말하는 인간적인 삶은 본능에 따른 생물학적, 생리학적 조건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만이 이룰수 있는 삶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강화해 나가 스스로의 초월을 시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존에 머무르지 않고 극복하고 초월해서 새로운 가치정립을 통해 더 나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치전도는 정지되어 있고 화석화되어 버리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삶의 가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영원한 기쁨 그 자체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비극정신을 품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여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였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전통형이상학과 여러 종교, 특히 유럽을 장악한 기독교는 육체와 현실의 삶을 부정하게 하고 오직 종교적 인간만을 추구하는 믿음을 심어주면서 피안세계의 인간의 구원을 강조하여 인간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죄의식을 강화하고 삶을 부정하게 만들었으며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니체의 이 철학적 사고에 깊은 공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익숙해져 버린 사상, 믿음, 이념, 삶의 형태에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근원부터 사고하는 힘을 가지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우연히 믿게 된 종교, 가족이나 사회적 영향에 의해 믿게 된 종교를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은 채 평생동안 목숨처럼 믿습니다. 특정 종교를 믿은 가정이나 국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그 종교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는 자신들의 교리와 믿음에 반하는 과학적 사실도 부정하며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이것은 니체에게는 사고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다운 삶이 아닌 것입니다. 사회적 통념, 관습, 문화, 규범, 법, 제도 등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쌓아온 모든 것들에 대한 재정립을 시도하지 못한 채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고 지키려고만 합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은 같은 인간에게 등급을 나누어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해 왔는지 모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과학의 세계에서도 니체의 가치전도는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으로는 아무리 봐도 해가 움직이며 별들이 움직였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천동설도 가치전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예들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니체의 가치전도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한 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어떤 신념, 이념, 믿음에 빠져 살고 있는지 살펴보시고 니체가 말해준 것처럼 이 믿음과 신념과 이념, 철학, 생각들이 어디에서부터 왜 시작된 것인지 살펴보고 더 나은 것으로 가치전도를 시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찾으시길 바라며 너무나 짧아서 너무나 소중한 우리의 인생을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시길 응원합니다.

 

2) 대지의 철학

니체의 형이상학은 대지의 형이상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의지의 형이상학을 전개해 나가면서 전통형이상학을 비판한 것과 같이 니체는 피안의 세계가 아닌 이 세상의 대지 즉 인간이 몸을 지닌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삶의 지평에 중점을 둔 형이상학으로 전통형이상학을 비판합니다. 니체의 대지의 철학 세계는 플라톤의 이데아철학의 세계와 대립합니다. 니체는 현실세계를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 정도로 여기며 열등하고 유한한 것, 심지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배후세계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배후의 세계, 피안의 세계를 믿는 자는 초월적 세계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 세계를 동경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동경은 자기망각에 빠져 있는 인간들의 숙명이다. 그들은 신이 존재하며 세계를 신이 창조했지만 신은 세상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이 세계, 영원한 모순의 모사, 그나마도 불완전한 모사, 이러한 세계를 만든 불완전한 창조자에게 주어진 도취적 쾌락, 나에게는 한때 세계가 이렇게 보였다."

니체가 보기에는 신의 존재는 영원을 꿈꾸는 유한한 인간의 작품이자 망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여러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인간이 자신들의 무기력함과 극단적인 피로감을 해소하고자 도피방법으로 피안의 세계를 창조해 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 질 것을 요청합니다. 자신 스스로의 존재에 충실할 때 자신의 유한성을 발견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유한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며 간절하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에 충실할 때 가장 먼저 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 합니다. 영혼과 몸을 분리시키고 영혼은 영원하며 몸은 썩어 사라질 열등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전통적 사상과 믿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니체에게는 인간에게 몸은 모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여 있는 구체적인 현실성으로서의 몸이야말로 유일하게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것, 그것이 우리의 몸이며 인간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나는 전적으로 몸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영혼과 정신은 내 몸에 속한 어떤 것을 표현하는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니체는 인간 스스로가 불완전하고 유한한 몸과 세상을 회피하고 부정하고 싶어서 몸에서 영혼을 분리시키고 세상과 상상의 세상을 분리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오히려 불완전한 몸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행복만이 존재하지 않으며 고통과 파괴가 여전히 존재하는 인간의 삶, 그 자체로 만족하고 긍정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불완전한 몸과 세상을 긍정하는 고귀한 인간이 되어 몸과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세상에 생성되는 모든 것은 마지막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고통의 실상을 인식하는 자만이 대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대지, 이 세계는 더 이상 피안의 세계보다 열등한 것이거나 단순 모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실재적인 세계이며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세계가 바로 대지의 세계인 것입니다.

 

3) 생성세계와 영원회귀

니체는 1881년 8월 실바플라나 호수를 산책하며 사색을 하였습니다. 그때 가장 무거운 사상인 영원회귀 사상을 생각하게 되었고 영원회귀사상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철학을 완성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우리에게 전하게 됩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살아 왔던 이 삶을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미 존재했던 것이고 따라서 세계에서 새로운 것,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형태의 생성과 소멸이 이미 존재했던 것이며 따라서 지금의 존재나 앞으로의 존재도 이미 존재했던 것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세계가 순환한다는 생각은 이미 고대부터 신화와 종교, 철학을 통해 논의되어 온 것이지만 우리가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는 허무주의 적인 영원회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내며 이전의 존재가 아닌 새로운 존재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렇기에 늘 새롭게 태어난 존재는 유한하지만 영원한 존재에서 비롯되었기에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은 모든 존재의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올바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전통형이상학과 종교에 의해 왜곡된 삶의 비극적인 모습을 니체는 가장 깊은 고독 속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찾아내 염세주의와 낙관주의의 대립구도 속에서 순간을 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 줍니다.

 

4) 비극적 사유

니체에게 있어 비극의 경험은 존재의 심연으로 우리를 이끄는 실마리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비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처럼 단지 카타르시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하는 탁월한 사유장치입니다. 비극정신은 우리에게 유한한 인간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모순과 여러 갈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가 비극으로부터 삶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니체 역시 비극으로부터 삶의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과 세계의 존재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 논리, 법칙과 같은 용어로는 결코 삶의 깊은 심연을 설명할 수 없으며 비극을 통해 이론적이지 않은 삶의 심연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주어지는 비극적 사유는 카오스적인 존재의 생성을 이끌어 가게 하는 장치이며 이것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새로운 존재의 의미를 창조할 수있습니다.

 

5) 인간과 초인

니체는 새로운 인간이해를 제시하며 진정한 인간을 초인으로 규정합니다. 초인은 신의 죽음, 허무주의 극복, 힘을 향한-힘에 의한 의지, 영원회귀사상을 통해 고지되는 인간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고통 속의 삶을 긍정하는 인간이며 극복하는 자입니다. 자신을 본능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동물로 되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대지, 즉 세상 모든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자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교양을 지니고 대중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가치와 대중이 지향하하는 가치를 넘어서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중적인 것은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가치에 주목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본능을 충족시키는 삶을 추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초인은 논리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쫓는 자가 아니라 실존적이고 창조적인 가치를 생성하는 자이며 끊임없는 생성의 세계로 자신을 내던지는 자입니다. 초인에게 진리란 세계를 끊임없이 해석하고 창조하는 과정을 지속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자유로운 정신으로 모든 것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인은 인간의 완성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동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될 수 있을까? 니체 역시 모든 사람이 초인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의 고귀한 가치는 결코 대중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 부여될 수 없으며 과거의 그 어떤 철학이나 사상도 완전할 수 없기에 초인이 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인간이 추구해야할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6) 운명애

"어떤 시절보다 내 삶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더 깊이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나는 종종 자문했었다. 높은 곳에서 그 시절들을 바라보면 모든 것은 다 필연적이며 그 순간들은 그 자체로 유용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사람들은 견뎌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분명 불멸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피안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유한하며 세계의 존재는 지금, 여기에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슬프고 비극적인 상황임에 틀림없지만 이 유한성에 대한 깊은 자각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삶을 긍정하게 만들며 사랑하게 만드는 힘을 제공합니다. 니체가 말하는 비극적 사유, 즉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과 비극의 삶을 진실되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우리에게 닥친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 그 삶의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 스스로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능동적으로 살아내는 힘의 근원이 됩니다. 수동적인 정신(낙타의 정신이라고 비유한)을 지닌 인간은 주어진 삶에 얽매여 자신을 억압하는 외부의 제약에 저항하지 못하고 처해진 삶을 체념해 버립니다. 니체는 이러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고통스러운 삶과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삶에 대한 원한감정을 품는 것이 아니라 힘에 의한, 힘을 향한 의지로 새롭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주어진 삶의 조건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삶을 상실해 버리는 불성실한 삶을 거부하고 모든 형태의 원한감정과 원망을 극복하는 힘을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발휘해야 할 가장 인간적인 태도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부인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후 적극적으로 극복하여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전개하려는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것,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사상이며 새로운 존재를 잉태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숭고한 것입니다.

 

 

니체 역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병 때문에 고통스러웠고 시대가 주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들 때문에 힘겨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삶을 외면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실존의 상황들을 지평삼아 숭고한 정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고통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마저도 필연적이고 유용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능동적으로 쟁취하여 자신을 더욱 성장시켜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고 이를 뛰어넘어 사랑해야 한다는 니체의 철학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통철학과 종교에서 가정했던 불변하는 피상의 세계와 영혼과 육체의 구분으로 인한 오류와 허구성을 폭로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의 삶과 세계를 가장 빛나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요청한 니체에게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허상의 존재, 허구의 세계에 의존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창조해 나가는 삶을 살기를 바란 니체, 그는 진정 스스로가 자신이 말한 초인의 삶을 살아내며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수많은 철학자들로부터 쇼펜하우어를 포함한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니체는 결국 이 모든 것을 넘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습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니체가 영원회귀사상을 전개한 것입니다.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원자설을 기원전 4세기 경 데모크리투스가 주장했고 니체가 태어난 1844년에 생을 마감한 돌턴이 모든 물질은 원자라는 기본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지만 본격적으로 미시적 세계의 원자, 분자, 전자, 소립자를 연구하는 양자역학은 20세기 들어서 막스 플랑크로부터 양자가설이 세워지며 시작되어 아인슈타인, 막스 보른, 폰노이만, 파인먼을 거쳐 20세기 중반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우주의 근원과 우주 이전의 세계, 혹은 우주 밖을 논하기에는 인간이 알고 있고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제한되어 언급할 수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실존세계는 많은 부분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주, 모든 물질은 근원적 물질에서 파생되었으며 우주의 모든 물질은 결국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니체가 어떻게 파악하고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미 존재했던 것이고 따라서 세계에서 새로운 것,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없다는 생각을 펼쳤는지 궁금하고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모든 형태의 생성과 소멸이 이미 존재했던 것이며 따라서 지금의 존재나 앞으로의 존재도 이미 존재했던 것과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그의 주장은 현대 물리학, 양자역학을 충분히 연구한 사람이 주장하는 것과 유사해 보입니다. 물론 이렇게 따지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갈 무렵 원자설을 주장한 데모크리투스의 탁월한 생각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를 정도로 놀랍지만 쇼펜하우어가 모든 물질의 근원, 사후세계까지는 언급하지 않은 것에 비하면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며 그가 말한 영원회귀사상은 단순히 윤회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로서의 영원회귀를 말하였고 모든 물질의 근원을 간파한 것이라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니체는 비극적 삶의 현실을 금욕과 고행으로 극복하라는 쇼펜하우어의 제안을 뛰어넘는 탁월한 철학적 사상을 펼쳐주었으며 우리에게 더욱 현실적이고 명확하며 좀 더 나은 합리적 철학을 제시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적 없는 시대와 환경에 태어납니다. 이것부터가 이미 비극의 시작이 됩니다. 그 어떤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을 뜨니 특정한 시대에 한 국가, 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한 시계가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갑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모두 다릅니다. 심지어 주어진 시간을 알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간의 비극은 행복과 기쁨과 기대와 희망, 환희가 잠시 휴식을 주지만 시대와 삶, 육체와 정신이 주는 고통과 맞물려 우리를 고난속으로 몰고 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진솔한 삶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원한감정을 안고 살아가기 일쑤이며 이런 감정에 매몰되어 삶을 한탄하고 스스로를 점점 더 연약한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니체는 이를 간파하고 모든 인간들에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육체와 정신이 주어졌든 결국 이 세계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당히 주인공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생각과 관습, 전통과 종교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 스스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고 어떤 어려움도 필연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더욱 많은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나를 창조해 나가 한 번 뿐인 인생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인생을 누구보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억 속에 음흉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 원망과 원한감정들이 불쑥불쑥 현재의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니체의 제안대로 우리를 힘들게 했던 모든 일들과 환경들은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오히려 우리를 성장시켜 줄 유용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보시길 바랍니다. 실제로도 힘든 경험들이 가장 빛나는 보석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여러분의 현재의 모습에도 그런 부분이 있을 것이며 혹시라도 과거에 얽매여 한 걸음 나아가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용기를 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로운 내가 되어 새로운 삶을 창조해 살아가시기를 바라며 여러분께 주어진 삶의 주인공은 여러분임을 잊지 마시고 여러분의 삶을 마음껏 사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누구보다도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니체를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만나시기를 바라며 만나셨다면 이제 멋지게 초인이 되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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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인가요? 이 근원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한 인류...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양을 도는 아주 작은 우주 별, 지구에 태어난 우리. 그 사는 이야기, 또는 삶을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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