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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리뷰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쇼펜하우어 아포리즘)-1

by onyuan 202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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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그의 편지, 일기 등을 토대로 김욱 편역자가 새롭게 구성한 책입니다. 

 

1부

 

*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이 세상에 나 이상의 존재는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신의 문제고, 내가 존재한다는 건 오직 나만의 문제다. 나는 이 세상에 있고 싶고 이것이 중요하다. 나는 완전하고 탁월하다. 나보다 더 뛰어난 개성은 없다. 나는 누구와도 나를 바꾸고 싶지 않다. 내 모습이 어떻든 지금 이대로의 나, 그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고 나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150년 전 한 책상에 앉아 자신을 돌아보고 글을 쓰고 있는 쇼펜하우어를 상상해 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왜 이 질문을 수천 년째하고 있으며 이렇게 간단명료한 단 하나의 질문에 답을 못하는 것일까요? 고인류학적 흔적들은 부인하기 힘든 증거를 제시해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불과 15~20만 년 전쯤부터 한 종으로 뿌리를 내려 생존을 이어왔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호모종은 2~300만 년 전부터 혹독한 지구의 환경을 이겨내며 생존해 왔으나 약간의 DNA를 남기기도 했지만 사피엔스인 현 인류를 제외하고 모두 멸종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인 우리는 세월이 흘러 현재에는 70억 명이 지구라는 작은 소행성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수없이 많은 이들이 생을 마감하고 있으며 매일 그만큼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지구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가 이와 같습니다.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나며 주어진 환경에 일정한 개체수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인간과 환경의 변화로 인해 아예 멸종해 버린 생명체들도 있습니다. 지금도 멸종은 진행 중이며 우리 인간 역시 지구, 태양계 혹은 우주에 얼마나 더 많은 생존의 흔적을 남길지 모릅니다. 남긴 흔적들이 언젠가 완전히 소멸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힘, 추론하고 상상할 수 있는 힘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고 삶의 터전과 살아가는 방식을 구축해 왔습니다. 인간의 뇌는 오판과 오해, 실수 그리고 한계를 가지고 있어 무지함에 갇히기도 하고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기도 하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인은 100년 남짓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해답을 제시해 왔고 그 개인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도 제시해 왔습니다. 

  그리고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밝히기도 어려운 영혼이라는 신비로운 영역은 인간 존재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경험한 믿기 힘든 일들은 과학적으로 설명을 아직 못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신비로운 영역이 현실과 맞닿아 있는지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지구 밖 우주에 생존하고 있는 생명체, 아직은 속시원하게 확정되지는 못했지만 여러 국가가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의 흔적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뿐입니까? 우리의 인생을 한 번 돌아보면 거대한 우주의 원리와 원칙에 휩쓸리는 너무나 연약한 생명체에 불과합니다.  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어도 그저 자연현상에 의한 것일 뿐이며 그 어떤 울음과 항변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빙하기가 시작되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멸종하거나 견디거나 둘 중 한 가지의 결과를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다고 해서 지진이 피해 가거나 우리를 위해서 태풍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가 우리 인간이 살고 있다고 해서 영원히 보존되지도 않습니다. 우주는 우리의 존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인간들끼리는 또 어떻습니까? 내가 힘이나 돈, 권력을 가진 자라면 그 편안함과 안락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뿐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인간사회는 자연의 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으며 집단적으로 거대한 힘을 모으지 않고는 아무소용 없었습니다. 현재도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면 그 당사자가 죽을 힘을 다해 몸부림쳐야 하고 피해자와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가진 자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또한 소수의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이 경험해서는 안 되는 극한의 고통과 공포와 아픔을 겪으며 살아왔고 살아가야 합니다. 전쟁은 인간의 삶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며 목숨, 정신, 육체까지 짓밟아 버립니다. 그리고 집단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고와 범죄에 노출되어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는 순간까지 고통받으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화창한 날씨에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행복을 만끽하고 사랑을 나누는 순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행복으로 인생을 가득 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넘쳐나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이들도 있겠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20세기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인류를 파멸로 이끌 핵무기가 개발되어 대규모 전쟁의 위험을 피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현재에는 인생의 행복을 즐기고 누리는 사람들이 좀 더 많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경제와 과학기술, 의학, 정치 등이 발달하고 성장하여 평화와 자유, 건강 등 많은 혜택을 주고 있으며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며 새로운 사회적 문제들의 발생에 고통받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만으로 인생을 모두 채우는 사람은 아마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동물들 중에서 새끼를 낳았는데 위험을 감지하면 스스로 죽여버리는 종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이 좋지 않으면 번식을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본능을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현상이 현재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강하고 독해 지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을 마주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자연의 힘 앞에 무참히 흽쓸리고 인간이 만든 사회시스템, 권력 앞에 무너지고 온갖 질병에 노출되어 정말 힘없이 아파하고 죽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여기에 죽음이라는 강제적인 이별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니 아픔 없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나는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 답을 내리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하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개미가 우주를 전혀 이해할 수 없듯 말입니다. 대신 이 질문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주어진 짧은 삶을 조금이나마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는 해 주지 않나요? 스스로가 겸손해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내 삶에 찾아오는 많은 어려움과 현상들을 조금은 부드럽게 수용할 수 있게 도와주는 질문인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깊이 통찰하는 삶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 자신이 가장 나답게 살 수 있는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나를 깨닫고 알아야 진정으로 나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 쇼펜하우어의 생각으로 돌아가보면 단 하나 뿐인 나라는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스스로 인식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스스로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이 바로 나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깊이 곱씹어 봅니다.

 

*다수는 그저 많은 숫자일 뿐, 많다고 정의가 되는 건 아니다

  인생에 진리는 없다. 삶은 어리석은 동화일 뿐, 그래서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세상은 내가 틀렸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세상이야말로 내 눈엔 실수와 오류투성이다. 옳고 그름 따윈 없다. 다수는 그저 많은 숫자일 뿐, 많다고 정의가 되는 건 아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겠다. 물론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모를 것도 없다.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할 뿐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말하겠다. 나는 역사의 훼방꾼이며 파괴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책 한 권으로 말해야 하는 것을 열 개의 문장으로 설명해 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는 진실을 한 권의 책으로 무한히 써 내려갈 것이다. 

  

  세상이 이것이 진리이며 저것이 진실이라고 말할 때 명철한 판단력이 뒷받침 된 비판적 사고를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아무에게나 허락되지는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어떤 믿음과 생각이 진리로 인식하고 있는 집단속에서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는다는 것은 정말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할 때에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고 다수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해 보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린 언제나 틀릴 수 있는 존재이니까요.

 

*산책의 동료는 고뇌로 족하다

  나는 늘 같은 시간에 산책하려고 노력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발해 같은 시간에 끝마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산책할 때 나는 생각할 것들을 챙겨간다. 그래서 나는 동행자를 두지 않는다. 산책은 고뇌로 족하다.

  건강한 생활은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통해 개선된다. 육체와 정신 양쪽 모두 건강한 성공적인 생활은 매우 드물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고 그 핵심에는 인내가 자리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인내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그 한계 안에서 지속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 진정한 인내이다. 자신이 견딜 수 없음에도 버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생활에는 정답이 없다. 위대한 칸트는 평생 여행을 하지 않았고 무익하고 시간 낭비라고 취급했다. 그러나 나에게 여행은 일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낯설고 새로운 독서이자 경이로운 우정이었고 참된 스승의 역할을 해주었다. 규칙적이지 않은 위대한 생애는 없다. 칸트에게는 그런 생활이 적합했기에 그의 삶과 생각은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알맞은 규칙을 정해놓고 인내라는 재능을 발휘하여 습관화한다면 자신만의 위대한 삶이 쌓여갈 것이다. 남들과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말을 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특별함은 자신이 세운 자신만의 규칙을 인내하며 꾸준히 지켜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정말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해준 글입니다. 자신에게 알맞은 좋은 습관을 규칙적으로 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학교생활, 회사생활 등 사회가 강제하는 일정을 반드시 해야 하기에 규칙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좋은 습관을 규칙적으로 하지는 못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육체와 정신 건강을 위해 매일 산책을 하고 여행을 하며 깊은 명상의 시간을 가진 쇼펜하우어의 삶은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쇼펜하우어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자신 스스로가 좋다고 판단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안타깝고 배려 없는 조언이며 부질없는 생각인지 모른 채 강요하듯 권합니다. 

 

* 나만 힘들고, 나만 피곤하고, 나만 희생당한다는 착각

  새롭지만 전혀 새롭지 않은 정신질환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바로 우울이다.  우울은 말 그대로 정신이 우울해졌다는 뜻이다. 우울해진 근본적인 원인은 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를 위해 발달한 기술은 인간의 정신을 우울하게 만든다. 기술은 인간의 정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안락한 삶에 도취된 인간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쉬운 방법을 찾다가 우울에 빠져 버릴 뿐 이성적 고뇌로 치열하게 싸워 극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울함이 두려운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특별한 증세를 보이지 않는다. 우울의 덫에 빠졌을 때 증상이 있어야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데 아무런 증상도 없이 우리 자신을 위험에 가두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간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 외롭고, 힘들고, 희생당하는 망령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우울의 망령에 정복당하면 오직 분노만이 남게 된다. 외로워서 화가 나고 피곤해서 화가 나고 되는 일이 없어서 화가 나고 남들의 행복을 보는 것에도 화가 난다. 마침내 화만 내는 자신 스스로가 싫어서 화가 난다.

 

  현재와 비교해 보면 걸음마 수준의 기술 발전이 있었을 시기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수천 년 전 이집트에서 기성세대가 요즘 젊은 사람들의 모습을 나쁘게 평가한 것처럼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살아가는 방식과 기술들에 의한 환경만 다를 뿐 똑같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50년 전에도 우울증이 사회에 만연했고 인생이 가져다준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았다니 그 시대의 사람들과 현대의 우리가 맞닿아 있는 느낌이 듭니다. 생각해보면 그 시대에는 지금보다 더 극심한 빈부의 격차가 있었고 약육강식의 법칙이 더욱 무섭게 인간 사회를 강타했을 것입니다. 권력과 부는 소수만이 누렸을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과 굶주림, 추위와 질병 등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철저히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뚜렷하게 구별된 사회에서 짐승보다 못한 취급까지 받으며 사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조선후기에 조선을 찾아온 선교사들의 글을 보면 조선사람들은 술독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고 인생을 포기한 채 떠돌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 눈에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만 불평등한 사회에서 억울한 상황을 받아들이며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맨 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습니까.

  어쨌든 우울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예의주시해야 하는 것이며 이를 잘 극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만은 우리가 반드시 직시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는 마음과 분노가 마음에 자리하고 계신가요? 참으로 억울하고 속상하고 분하시겠지만 우리의 인생이 그러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말은 사실 여러분의 분노와 우울함을 약간 줄여줄 수는 있지만 치유해 줄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내 삶의 고통을 어찌 상쇄시킨단 말입니까? 우리는 우리 손톱에 박힌 바늘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쇼펜하우어가 제안하는 방법을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성적 고뇌로 치열하게 싸워 극복하는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의 인생을 대신해 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시고 독서도 하고 기회가 된다면 상담도 받아 보시고 명상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말그대로 치열하게 싸워 이겨내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숙명입니다. 소리 없이 다가와 조용히 우리를 잠식해 버리는 우울함에 빠지지 않으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 명예와 체면

  나를 두고 남들이 멋대로 떠들어댄 이야기 때문에 사회적 평가가 확립될 수 있다.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나에 대해 떠들어대는 헛소리 때문에 한 인간의 삶이 무참히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개에게 물려도 아프고 화가 나며 당나귀 발굽에 치여도 아프고 화가 난다. 하지만 개에게 물렸다고 인간으로서의 나의 명예가 짓밟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물었던 개의 엉덩이를 차주고 왔다고 해서 나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고 논쟁은 말싸움으로 번져 무식한 시민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단 한 번도 고발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망아지가 나를 쳤다고 해서 고발하는 철학자는 없다고 말했다. 오늘날 체면과 명예가 그 사람의 전부인 양 절대적인 대접을 받는 이유는 이 시대의 인간관계, 혹은 권위와 신분이 편견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체면을 중시하는 까닭은 내세울 인간성이 그것말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존경받을 그 무언가가 없으니 명예훼손이라는 협박으로 타인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것이다. 타인의 권리를 존중해 주는 세상이 아니기에 안타깝게도 스스로 타인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입속의 칼날을 휘두르고 증오하는 자들과 맞서 싸우는 위협의 명분으로 명예와 체면이 남용되는 중이다.

 

  오늘날 우리가 깊이 새겨 들어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인류가 점차 집단을 형성하며 공동체의 규모가 커질 때 소문과 고자질 등을 활용해서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명예와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자존감이 낮거나 인격과 성품이 부족해서 타인들의 평가에 지나치게 얽매인다면 자신과 자신의 삶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타인들의 평가와 수군거림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까. 

  타인의 말과 평가에 자신이 지나치게 신경을 쓰거나 괴로워한다면 스스로를 돌아보고 현명하게 대처하려고 노력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타인들의 거짓말, 헛소리, 비난 등을 들으면 괴롭고 분노합니다.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말과 말투인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마음에서 나오며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떳떳하고 훌륭한 성품을 갖추었다면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천 년 전 힘과 폭력이 우선시되던 시대를 살았던 현명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폭력에 시달렸겠습니까? 지금의 사회 시스템 안에서도 이를 제대로 막지 못해 숱한 범죄와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는데 그 옛날에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 현명한 사람들이 어떻게 극복했냐는 것입니다. 개에게 물렸다고, 망아지에게 차였다고 동일한 방법으로 복수하지 않았고 그 일로 자신의 명예나 체면이 구겨진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이들에 의해 오해받을 때도 있고 험담을 들을 때도 있으며 억울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동일한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사람이며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분노하거나 자신을 파괴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이 지나치게 신경 쓰고 분노한다면 그 에너지를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좌우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게다가 잘못된 평가가 우리를 대변하지 못합니다. 타인들의 험담과 비난, 살인적인 말들에 힘들어하는 분이 계시다면 쇼펜하우어의 이 글에서 힘을 얻으시고 현명한 대응방법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 누구나 자신의 산에 오르기를 꿈꾼다

  등산의 기쁨은 정상을 정복했을 때일 것이다. 그러나 최상의 기쁨은 험준한 산을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정상에 도착하는 것만이 성공이라고 여기고 이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참된 성공의 기쁨을 맛볼 수 없으며 자신의 꾀에 언젠가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성공을 시기해서 스스로를 불행의 길에 들어서게 할 것이다. 산 정상에 오르고 싶다면 타인과 경쟁을 하려고 하거나 자신을 앞질러 가는 사람을 떠밀어서도 안 된다. 그저 정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능력에 맞게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지만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누구의 도전이 가장 영광스러울까? 실패할 때마다 힘차게 다시 일어나 도전을 멈추지 않는 자에게 정상의 영광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인내를 그대의 의복으로 삼아라. 의복을 벗고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질 것이니 인내라는 의복을 절대로 벗지 않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수치를 당하지 않고 정상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언제나 우리를 기다려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게을리 걸어도 정상에 도착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참된 인내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품고 있다.

 

  인내라는 옷을 입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특히 외출을 할 때에는 필수입니다. 인내를 이렇게 여기고 늘 입고 산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인내라는 멋진 옷을 입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늙음의 덧없음

  나이가 들고부터는 무엇을 봐도 예전처럼 흥미가 일어나지 않는다. 어느새 내 안에서 열정이 사라졌다. 아름다운 여인도 나의 마음에 불을 지피지 못하고 사랑스러운 말도 내 귀를 간지럽히지 못한다. 뭔가를 생각해도 끝에 다다르지 못하고 중도에 사라진다. 기력이 쇠약해진 노인은 혼자 비틀거리며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거리를 맴돈다. 그러다 지치면 구석진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과거의 젊은 날을 추억하고 그럴 때마다 죽음과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는 게 느껴진다. 세월은 모든 것을 녹이는 거대한 용광로처럼 우리의 삶을 조금씩 녹여 이름 없는 대지에 부어버린다.

  세상에 진실한 것이 있을까? 절망과 희망이 우리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절망은 우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단지 상처받은 인간의 마음에 정중히 노크했을 뿐이다. 다만 인간이 지레 겁을 먹고 절망을 죽음과 혼동하였던 것이다. 희망 또한 우리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희망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을 속여 왔다. 희망을 실제로 우리 곁에 오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기다리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면 인간은 참혹한 순간을 온몸으로 버텨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절망은 희망보다 솔직하다. 희망을 절망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절망은 결코 우리에게 희망을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몰락의 징조를 깨닫기 시작하는 노인이 되어서야 도덕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죽음이 가장 성스러운 가치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열매임을 깨닫게 된다. 병든 몸으로 내가 궁리해볼 수 있는 남겨진 과제는 이것뿐이다.

 

 

* 인생에서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아직 이르다고 생각될 때 죽음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것은 망상이다. 죽음은 그에게 꼭 필요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삶에 집착하는 자에게 죽음은 더 빨리 찾아오고 죽음을 기다리는 자에게 삶은 더욱 긴 시간을 펼쳐놓는다.

  불명확한 인생에서 죽음보다 확실한 사실은 없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사실보다 명확한 전제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죽음을 떠올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삶이 허락된 이유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죽음의 준비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죽음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으며 공포와 후회도 없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죽음으로부터의 공포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막이다.

  죽음이 두려운 까닭은 공허와 암흑이 떠오르기 때문이며 공허와 암흑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도처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모든 생명체가 걸어가야 할 필수 과정이며 절대로 사라질 리 없는 길이다. 죽음이야말로 우리를 완성하는 강력한 본성이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죽음일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승이 낫다는 옛말처럼 삶이 힘겨워도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다음 월드컵의 우승팀이 궁금하고 인간이 우주여행을 할 날을 목격하고 경험하고 싶으며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두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늘 반복되는 일상 같지만 항상 특별한 일들이 발생하기도 해서 뉴스를 꼭 챙겨보는 재미를 모두가 아실 겁니다. 세상이 무너져버린 것 같은 좌절에 빠져 있다가도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날이 오는 인생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건강을 위해, 죽음을 피하기 위해 그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스스로를 살해할 수 없어서 죽는 것보다 힘든 삶을 살아가고 계신 분들을 제외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인생을 마감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자 하는 분들이 많으며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노년기에 접어들거나 큰 고통의 나날을 그저 견디는 수준의 생명연장을 하게 된다면 죽음이 정말 확실하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죽음을 선택하고 싶은 상황에 놓여 있지 않다면 죽음은 피하고 싶은 인생의 종착지일 것입니다. 굳이 죽음 이후가 두렵고 걱정스럽지 않다 하더라도 살아오며 사랑하게 된 사람들과 좋아하던 모든 것들과의 이별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위로하며 억지로 수용하려고 정리하는 것이지 사랑하게 된 모든 것들과의 이별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까요? 좀 더 억울하고 안타까운 것은 사랑을 많이 나누고 사는 삶이 분명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생각되어 그리 살았는데 그 사랑이 죽음 앞에서 너무 큰 아픔과 고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결국 우리는 죽는다고 하더라도 멋진 인생을 살다가 우리의 삶을 마무리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삶을 암흑으로 여기게 만들어도 최선을 다해 사는 삶만이 후회 없는 인생을 만들어주며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다에 살던 물고기가 사람에게 잡혀 작은 어항에 갇혔을 때 그 물고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또 삶을 이어가는 것 말고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뿐입니다.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절박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현재 여러분이 죽음을 선택할 만큼의 상황이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루는 정말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가장 행복한 일을 계획하시고 실천하면서 살아가신다면 분명 여러분의 인생은 후회 없는 멋진 삶으로 채워질 것이고 그 힘이 죽음의 공포와 후회를 날려버릴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 비관론자라고 말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인간의 참된 모습과 우리가 직면한 세상을 가장 솔직하게 바라보려고 노력한 철학자인 것 같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잠시 잊게 하려고 마약과 같은 망상을 주입하고 확인할 방법도 없는 죽음 저 너머의 그 어떤 세상을 꿈꾸게 만드는 비굴한 모습보다 뼈속까지 솔직하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명확하게 직시해서 더욱 뜨겁고 강렬하게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해내야 하는 일이며 주어진 삶의 목표가 아닐까요?

 

* 누구든 오래 산다는 것은 징계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대지 위에 온갖 종류의 불행과 좌절과 죽음들이 널브러져 있다. 사람들은 사는 게 괴롭다는 말을 쉴 새 없이 하면서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 부를 가진 자들, 권력을 가진 자들, 심지어 천국을 창조해 자신들의 것인 양 면죄부와 구원을 판매하는 목사들마저도 나이가 들면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깊은 좌절을 맛본다. 녹슬고 고장 난 자신을 기쁨으로 맞이해 주지 못한다. 그리고 오래 살다 보니 보지 말았으면 좋았을 일들과 듣지 말았으면 좋았을 소리들을 듣게 된다.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들이 보기에 세상에 부러운 인간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반대로 불쌍한 인간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지금도 많다. 인생은 태어난 모든 생명체가 짊어진 짐이며 걸어갈수록 등허리가 휘어진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나의 철학에는 위로가 없다며 나를 비난한다. 이런 비난은 세상을 창조한 이가 있으며 세상보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한 그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 줄 것이라는 거짓말이 듣고 싶어 교회 목사를 추궁하는 가난한 성도들의 욕심과 다르지 않다. 나는 굴복할 의사가 없다. 교회에 나가는 것을 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구원이 있고 천국이 있으며 사랑과 화평이 넘친다는 말을 듣고 싶다면 교리나 성서를 개정하는 편이 빠르다. 나의 철학에서 신앙 문답과 같은 죄 사함의 기만을 갈구해서는 곤란하다. 당신들의 주문에 응할만한 장사꾼은 대학강단에 널리고 널렸다. 돈 몇 푼 만 던져주면 기대 이상으로 인류의 삶을 아름답게 포장해 줄 사이비 철학자들이 널리고 널렸다.

 

  

* 판단을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 인간 정신의 정점이다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은 판단이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만큼 개체로서 완성도와 독립성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 판단은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제시된 의견과 정보를 비판하고 보완하고 새롭게 정립하는 과정이야말로 사색이라는 직관적 표상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정신적 세계에 자기만의 영토를 다르릴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판단과 권위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난제와 부딪혔을 때 권위 있는 누군가의 말을 따르면서 스스로 판단했다고 착각하곤 한다. 인간의 나약한 정신은 힘들게 자신의 이해와 통찰을 동원하기보다는 타인이 떨어뜨린 몇 마디 말을 잽싸게 주워 담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삼킨 후 배설하기를 즐겨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 이마저도 어려워하는 인간들이 많아 손쉽게 지식인, 학자라는 이름표를 취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세네카의 한탄처럼 스스로 판단하기보다는 누군가의 말을 믿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논쟁이 시작되면 권위 있는 누군가의 말을 무기로 사용한다.

 

  이 글은 가슴에 새기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과제이며 우리가 해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 1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공부만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성적에 얽매어서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성인으로 내몰리는 것은 아닌지. 저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내가 과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준비가 되었는지는 관심이 없었고 나이가 되면 투표권을 줬으며 인생은 우리에게 판단해서 결정하라는 시험지를 계속 내밀었습니다. 저는 사람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세상이 어떤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주어진 인생의 시험지에 서툰 답안을 내놓았고 그로 인해 말할 수 없는 후회와 아픔과 상처가 인생 곳곳에 남겨져 지금까지도 슬프고 힘들게 합니다. 

  여러분을 어떠신지요? 친구, 후배의 소개로 다단계에도 빠져보고 이단의 꼬임에 넘어갈 뻔도 하고 도를 아십니까를 외치는 사람에게 붙잡혀 시간과 돈을 낭비해 보기도 합니다. 돈을 빌려주고 못 받기도 하고 사람을 믿었다가 사기도 당해보고 사람 보는 눈이 좋지 못해 친구도 잘못 사귀어보고 이성과의 교제에서도 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조심스럽지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결혼 역시 우리 자신의 부족한 판단력으로 인해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들을 돌아보면 누군가의 조언과 누군가의 말들에 우리 자신이 너무 쉽게 넘어가거나 흔들리지는 않았나요? 혹은 아직 뭘 잘 모르는 자기 자신의 무모한 결단과 판단력의 목소리에 너무 쉽게 의지하지는 않았나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판단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권위있는 사람, 권위 있는 책의 말을 그저 믿고 싶어 하는 나약한 본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고뇌하고 사색하고 숙고해서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강화시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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