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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우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by onyuan 2025.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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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선포... 국민과 전쟁을 선포하고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것으로 판단되는 많은 사람들을 제거하고 독재까지 해보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판단되는 정말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면서 쿠데타, 폭력으로 정권을 잡은 첫 대통령, 박정희가 궁금해졌다.

 

  나름 역사를 공부한 나인데...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배울 기회가 적었고 제대로 가르쳐주는 교사, 교수도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린 왜 우리나라의 대통령에 대해서 이렇게 모를까?  

 그 이유는 우선 정권 주도의 역사 서술과 검열이 심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1961~1979)과 그 이후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교과서를 검정하거나 집필했다. 이 시기 교과서는 박정희의 산업화 성과와 경제 발전 중심으로 서술되었고, 유신체제나 인권 억압, 독재 통치는 축소되거나 삭제되었다. 비판적 시각이나 사회운동, 야당의 활동 등은 거의 다루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니 대학에서도 제대로된 토론이나 학습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런 대학에서 공부하고 임용고시에 합격해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조차 제대로 배운 적 없이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교육하였다. 사실 학교는 정부를 찬양하는 교육을 강제하는 무서운 집단이 되어 국민들을 무지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정치적 갈등이 역사를 상식적이고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판단하여 교육할 수 없게 만들었다. 2000년대 이후 진보-보수 정권 간의 역사 서술 방식 갈등이 심했었다. 박정희 정권을 찬양하는 언론에 세뇌된 이들의 표를 얻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했다. 박정희와 동일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박정희를 옹호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딸인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국정교과서’를 추진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강화하려 했다.

  세 번째로 언론 방송이 정권의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렸다. 박정희 정권 당시에는 언론에 대한 강력한 검열과 통제가 있었는데 ‘긴급조치’, ‘언론 통폐합’, 반정부 언론인 탄압 등 이후에도 방송사와 언론이 정권에 따라 편향적인 보도를 하면서 박정희의 공과에 대해 균형 있게 다루는 다큐멘터리나 보도가 드물다. 언론과 방송은 박정희를 영웅으로 묘사했고 그를 찬양하는 특집 방송들로 국민들을 세뇌시켰다.

  네 번째, 국민들 역시 역사를 제대로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뇌된 내용들은 더욱 완강하게 굳어져 큰 세력을 이루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 그럼 박정희, 그의 인생을 알아보자.

(논문을 작성하듯 연구한 내용은 아니지만 나름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수준은 될 것이다.)

1.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긍정적 평가와 '민주주의를 억압한 독재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그의 삶은 가난한 농촌의 아들에서 시작하여 교사, 일본군 장교, 남로당원, 국군 장교, 그리고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역사의 연속이었다. 특히 그의 초기 생애에 나타나는 친일 행적과 남로당 가입 이력은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1) 박정희의 생애 (연대순)

  • 1917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現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서 가난한 농가의 7남매 중 막내로 출생.
  •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
  • 1940년: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국(일본의 괴뢰국)의 신경(新京)군관학교에 제2기로 입학.(아래에서 다루겠지만 이 시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향했는데)
  • 1942년: 신경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57기로 편입.
  •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 관동군에 배치되어 복무.
  •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함. 이후 중국 베이징에서 광복군에 잠시 몸담았다가 귀국.
  •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 2기로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군 대위로 임관.
  • 1948년: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가입 혐의로 체포됨.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군 내부의 남로당 조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감형되어 풀려나 군무원으로 복직.(배신자의 모습인듯)
  • 1950년: 6.25 전쟁 발발과 함께 군에 현역으로 복귀. 이후 전투와 군 행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
  • 1953년: 휴전 협정 후 육군 준장으로 진급.
  •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실질적인 국가 최고 권력자가 됨.
  • 1963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고,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 (제3공화국).
  • 1964년 ~ 197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며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 이 과정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1965), 베트남 전쟁 파병 등을 단행.
  •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 헌법을 제정. 영구 집권의 길을 열고 독재 체제를 강화 (제4공화국).
  •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서거.

2) 주요 논란 1: 친일 행적

박정희의 친일 행적 논란은 주로 그가 만주군 장교가 되기 위해 보인 적극적인 행보와 복무 사실에 집중된다.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다. 이는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처했던 상황이기도 했지만, 자발성과 충성도의 측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 '혈서(血書)' 지원 논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할 당시 나이 제한을 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입학을 허가받기 위해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을 위해 희생한다)'이라는 내용의 혈서를 써서 제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 혈서는 박정희의 적극적인 친일 의지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증거로 꼽히며,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군(軍) 부문에 이름이 올랐다. 이 정도면 정말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과 뭐가 다른가? 더 심한 매국노 아닌가?
  •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개와 말처럼 충성하겠다? 
  • 만주군 장교 복무: 그가 복무한 만주군은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 세운 괴뢰국의 군대였다. 만주군의 주된 임무 중 하나는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 독립군 세력을 탄압하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직접 독립군 토벌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명확하고 직접적인 기록은 부족하지만, 그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에 봉사하는 군대의 장교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독립군의 주활동 무대가 만주였으니 독립군을 향해 총을 겨눈 것이 확정적인 것 같다. 이 사실을 본인은 잘 알고 살았겠지? 

  이러한 행적 때문에 비판하는 측에서는 그를 '기회주의적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는 반면, 옹호하는 측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한계를 안고 살았던 청년의 현실적 선택'이었다고 주장하며 평가가 엇갈린다. 현실적 선택이라... 그렇다면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은 비현실적 선택을 한 사람들로 봐야 하는가? 앞으로 한국이 또다시 침략을 당한다면 모두가 박정희처럼 현실적 선택을 하면 되는 것인가?

 

3) 주요 논란 2: 남로당 가입과 군사재판

해방 이후 박정희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 중 하나는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했던 이력이다.

  • 남로당 가입 배경: 해방 후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박정희는 그의 형인 박상희( 남로당 간부 )의 영향과 동료들의 권유로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했다. 당시 그는 국군 내부에 조직된 남로당의 군사 총책 역할을 맡을 정도로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체포와 사형 선고: 1948년 여순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가 군 내부의 좌익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대대적인 숙군(肅軍) 작업을 벌일 때, 남로당 조직의 일원이었던 박정희도 체포되었다. 그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 전향과 정보 제공: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박정희는 수사 과정에 적극 협조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군 내부의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수사 책임자들에게 넘겼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사형을 면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6.25 전쟁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싸웠고, 훗날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반공(反共)'을 국시(國是)의 제1원칙으로 내세웠다.
    당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국민들로서는 공산주의 남로당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려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혼란의 시기였다. 함께 일하고 평등하게 나누며 살아가자는 슬로건은 중국 대륙을 휩쓸기까지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런 이념의 이데올로기적 고민에 의한 결단이 아니라 그의  활동은 그저 군 내 권력 기반을 넓히려는 시도였을 뿐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도 버리고 공산당도 가입했다가 배신까지 해버리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대단한 인간 카멜레온이다.
    훗날 유신체제, 독재 체제 구축에 있어서도 이런 실용주의와 권력 중심의 사고가 이어진다는 평가가 있다.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남아 어떻게든 자신의 유익을 챙겨... 최고의 권력까지 손에 넣었던 박정희...

  돈을 벌기 위해 일본과 수치스러운 협정을 했고 미군에게 국민의 몸을 팔게 했고 모두가 회피한 베트남 전쟁에 자발적으로 우리의 젊은 이들을 보내 희생시켰다. 그런 돈으로 만든 고속도로가 뭐가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우린 아직까지 고속도로가 없는 국가였단 말인가? 우리나라를 박정희보다 잘 이끌 인물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가 대한민국의 경제를 눈부시게 성장시킬 토대를 마련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을까? 

  오히려 나는 상상해본다.

  훌륭한 대통령이 통일에 관심이 있었던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 잘 화합하여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북한과 자유롭게 왕래하며 평화롭게 성장한 대한민국을... 지금처럼 비행기와 배를 이용하지 않으면 타국으로 갈 수 없는 섬 아닌 섬나라가 아니라... 차를 타고 중국, 러시아, 몽골, 동남아시아, 유럽까지 다닐 수 있는 나라를 ... 웃으며 상상해본다.

 

  그리고 이산가족의 슬픔, 그 한이 결국 해소되지 못한 채 보낸 가슴 아픈 현실... 이산 가족이 지정된 마을에서 함께 살다 아름답게 생을 마칠 수 있었기를 상상해본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지하자원을 함께 개발해서 사용한다면 지금보다 더 발전한 국가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통일이 되지 않았더라도... 그런데 만약 통일이 되었다면...

한반도가 드디어 한 나라가 되었다면.... 우리는 정말 인구 1억에 육박하는 강대국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 고려... Korea... 그 영광을 다시 한 번....

강력한 국가의 힘으로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무덤도 잘 관리하며... 대륙을 다시 한 번 호령하는 대한민국.

  그 가슴벅찬 날을 상상해본다. 

 

 - 박정희를 누구보다 잘 알았을 최측근 김재규... 그가 박정희의 파렴치한 대학살을 막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김재규가 없었다면 박정희의 사악하고 악랄한 본모습은 온 천하에 드러났을 것이다. 그 모습 보자고 무고한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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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쉽지 않으시겠지만.. 지역도서관에 도서신청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 한 분도 없으신듯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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