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 성직자를 뜻함. 할아버지가 고위 성직자였고 그 영향이 뭉크의 아버지 크리스티안에게도 미쳤으리라.
신비의 화가 뭉크는 죽음의 검은 천사 속에서 살았다. 인간 뭉크는 5형제의 둘째로 1863년 러턴(Løten)에서 태어났지만, 군대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크리스티아나로 옮겼다. 뭉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는 30세에 결핵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누나 소피를 폐렴으로 잃었고, 이후 남동생 안드레아스도 같은 병으로 죽었다.
이 작품은 누이(소피에)가 폐렴이라는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 이모 카렌이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담긴 작품이다.
당시 뭉크도 폐렴에 걸렸으나 다행히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다. "열 살, 크리스마스날 밤 나는 피를 토했다. 열이 온몸을 흔들고 끔찍한 쇼크가 나를 삼켰다." 당시 의지할 것이라고는 종교, 신 뿐이었고 기도하고 맹세하며 삶을 애원했다. 그리고 누이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고 믿고 괴로워 했다. 아무것도 도움을 주지 못한 뭉크의 선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때 유럽은 '침대의 시절'이라고 불릴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폐렴으로 고통받은 시절이었다. 현재도 코로나 19(우한 폐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세계가 멈췄는가... 이것을 보면 의료체계, 의학, 병원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미흡했을 뭉크 시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몰아쳤을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남겨진 아이들은 이모인 카렌과 아버지가 돌보게 되었고 아버지는 노르웨이의 군의관이셨으나 빈민가에서 활동을 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어려웠다. (부촌과 빈민가 사이에서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할아버지께서 고위 성직자이셨고 종교적 가르침의 영향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신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그것이 그의 선함에서였든 종교적 신념-천국을 가기 위해-에서였든)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지만 미술에 대한 교육은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미술을 하기보다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여기서 잠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아내 레우라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었다. 그와 함께 살때에는 유머도 풍부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1868년 겨울, 사랑하는 아내가 뱃속에 아이를 잉태한 채 죽음을 맞이한 후 우울해 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점점 광적인 신자가 되었으며 주기적으로 종교적 발작도 보였고 하나님을 부르는 광기도 보였다고 한다. 힘없이 아내를 잃고 자녀들을 잃은 슬픔과 아픔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유럽은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하나님, 신이 죽은 자도 살린다는 가르침을 설파했으니 당연히 그 신에게 몸부림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지금도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 종교에 깊이 빠진다.
뭉크는 훗날 아버지의 신경증적인 광포함을 자신도 물려받은 것 같다고 회고하였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시대, 국가, 지역, 인종, 부모, 선천적인 유전자 등에 대한 그 어떤 선택권도 전혀 없이 그냥 태어난다. 태어나고 보니 전쟁이거나, 뭉크처럼 병마에 시름하는 시대라면 그 누가 슬픔과 싸우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의 삶이란 결코 위대하고 아름답지 않다. 슬픔과 괴로움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도 월등히 많았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경제가 좋아지고 전쟁이 잦아들었으며 의학이 발전한 지금은 조금 나아진 것일 뿐 여전히 정치적 고통 속에서 살거나 경제적 고난을 힘겹게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리고 의학이 조금 발전은 했지만 여전히 원인도 모르고 병명도 없는 병마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치료방법과 치료약이 없어서 죽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모두 병원에 있거나 집에만 있기에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 현실을 회피하거나 부인해서 뭉크가 보여주는 슬픔과 우울감을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100년도 채우지 못한 채 땅 속, 불 속 등 여러 장례절차를 경험할 진정한 우리의 현실이다.
카렌 이모의 초상화
뭉크의 그림 재능에 이모는 칭찬과 응원을 보낸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아버지의 바람보다 자신이 원하는 미술을 선택한다. 1879년 엔지니어학교에 입학했으나, 바로 진로를 바꿔 1880년 크리스티아나 왕립 드로잉아카데미에 입학, 대학도서관에서 혼자 예술사를 공부했다. 아카데미의 보수성은 그와 다른 여러 젊은 학도들로 하여금 1888년 학교를 떠나게 만들었고 크로그가 가르쳤던 풀토스텐(Pultosten) 스튜디오로 옮겼는데, 당시 크로그는 파리에서 돌아와 뭉크에게 유럽 예술의 국가적인 인식과 흐름을 소개했다. 그에게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소개한 것이다. (고흐, 고갱, 모네, 세잔 등으로 대표되는 인상주의는 순간에 보여진 인상을 담기 위해 신속하게 그림을 그리고 구체적인 형상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화풍을 말한다. 빛이 날씨와 계절,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색조로 표현하는 특징을 가졌으며 화풍도 다양했다.)
1883년 뭉크는 크리스티아나 국전에 데뷔하였고, 프리츠 타우로의 오픈 에어 아카데미(Open-Air Academy)에 참석했다. 타우로는 뭉크를 지지하여 그의 「MORNING」을 구매했을 뿐 아니라 그가 1888년 파리를 방문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었다. 다음 몇 년간 뭉크는 정치적 ·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크리스티아나 보헤미안 그룹에 빨려들어 작가 한스 예거, 요나스 리에, 예술가 크로그, 칼 구스타브 옌센의 진보파와 교류하였다. 이 기간은 일생 그의 인간생리, 심리패턴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뭉크의 첫 개인전이 1889년 4월 오스가르드스트란드(Åsgaardstrand)에서 열렸고, 10월 국가장학금으로 파리로 여행, 레온 보나의 스튜디오에 입학, 세계박람회와 테오 반 고흐의 갤러리를 방문했다.
프랑스에 가서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렸던 같은 거리의 그림과 달라진 뭉크의 작품...
1890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는 쇠약해졌으나(1908년에도 마찬가지), 예기치 못했던 세 번째 장학금으로 파리에 돌아와서, 크로그에게서 영감 받은 자연주의에서 내적인 인간에 반향을 일으키는 종합주의 예술로 옮겼다. 1892년 크리스티아나 개인전 후 베를린 초청을 받았으나, 그의 그림은 스캔들을 일으켜 전시회가 며칠 만에 끝났다. 그의 그림을 혹평하는 기사들이 주를 이루었으나 보여지는 것만을 그리는 인상주의를 넘어 그림에 감정까지 담아내려고 한 뭉크의 철학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집결시켰다. 뭉크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보여지는 찰나의 순간에도 그리는 사람의 감정이 함께 있을 수밖에 없으며 보여지는 사람들의 감정 역시 존재하며 그리는 사람에게 전달된다. 이것을 담아내려고 했던 뭉크...
뭉크는 툴라 라르센과 교제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적극적인 성격을 넘어 집착했다. 뭉크가 도피하면 끝까지 찾아갔으며 결혼할 수 없다고 하자 자살협박까지 한다. 당시의 교통과 통신망으로 어떻게 뭉크가 있는 곳을 찾았는지...대단하다. 미저리가 따로 없네... 뭉크는 마음이 여렸을까? 단호하게 자살을 하려면 해보라고 했어야 했는데....자살한다고 협박하고 소동을 부리니 다시 말리러 찾아갔고 정말 총을 들고 소동을 부리는 툴라를 말리는 도중에 방아쇠가 당겨졌고 손가락에 부상을 당하고 만다. 이 사고로 뭉크는 왼손 중지를 잃고 말았다. 정말 인복이 없는 뭉크다.... 부모님, 형제의 아픔이 있었던 만큼 그 아픔을 감싸줄 따뜻한 여자를 만났다면.... 물론 뭉크 자신이 툴라를 선택한 것에도 책임이 있지만...
이 작품은 툴라 라르센과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4가지 사랑의 변화가 담겨 있다는데... 홀로 있는 여성은 사랑하기 전의 모습, 뒷 편에 남자가 여자의 어깨동무를 하는 장면은 사랑을 시작한 시기... 우측 남자가 여자를 와락 껴안은 장면은 사랑이 집착이 된 장면... 그리고 가운데가 뭉크 자신의 슬프지만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 표정에 이별이 암시되어 있다... 서로의 마음에 사랑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뭉크는 파리를 방문하고 노르웨이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베를린에 남아 『Pan』을 발행했던 보헤미안 작가 및 예술가와 어울렸는데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르그(August Strindberg), 시인 스타니슬라프 비세프스키(Stanislaw Przybyszewski), 비평가 율리우스 마이어 그레페(Julius Meier-Graefe) 등이다.
야심적인 「THE FRIEZE OF LIFE」를 구상한 뭉크는 상징주의자로 1895년 핀란드 화가 갈렌 칼레라와 전시했고, 일 년 후 파리에 돌아와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모임으로 옮기면서 사무엘 빙(Samuel Bing)의 아르누보 갤러리에도 전시했다. 뭉크의 컬러 리토그라피와 우드 컷의 그래픽 실험은 고갱과 펠릭스 발로통의 장식미술에 혜택을 입었으며, 컬러와 라인의 심리적인 잠재성 추구는 그 자신의 독창성이다.
20 세기 초, 뭉크는 정신 피로와 심한 알코올의 고통에도 여전히 창조적으로, 1902년 「THE FRIEZE OF LIFE」를 Berlin Secession에 전시했고, 노르웨이와 파리 연극무대를 디자인했다. 1908년에는 오슬로대학 아우라(Aula) 강당 벽화 경연에 선정되었는데 주제는 빛나는 북구의 태양과 노르웨이 민족주의 철학을 상징하는 근육적인 젊음이다. 뭉크는 1916년 벽화를 완성시킨 후 오슬로 바깥의 에켈리(Ekely)에 집을 사서 여생을 보냈다. 1920년 대에 이르러 뭉크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나치 히틀러 시절 독일은 뭉크를 통해 북유럽에도 독일의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뭉크에게 협조를 했지만 뭉크는 거부했다. 그러자 독일은 뭉크의 그림들을 박물관에서 철수시키고 헐값에 내다 팔며 모질게 대했다. 뭉크의 용기있는 결단과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뭉크는 타고난 재능으로 일찌감치 주목을 받은 작가였다. 그는 죽음의 문턱을 경험했고 죽음의 슬픔을 가혹하게 겪었다. 그리고 격렬한 삶을 살았다. 그는 죽음과 두려움, 공포를 화폭에 담아냈으며 그 시대를 담아냈고 지금도 공감하는 그림을 남겼다. 유럽의 모든 중요 도시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 가장 이름난 국제적인 예술가이자 독일표현주의자에 의해 존경받음에도 1944년 81살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거의 고립되어 지냈다.
이 작품은 4가지 버전이 남겨져 있다고 한다. 파스텔로 그린 버전 등... 그 중 2점의 절규는 도난을 당하기도...
찾았지만 그 중 1점은 손상이 심했다고 한다.
노르웨이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붉은 노을이 하늘을 뒤덮는 풍경...
그리고 누이가 입원한 병원이 저 곳 뒤편에 있었다고 한다.
친구 2명과 함께 그곳을 다녀오다가 병원에 있는 수많은 이들의 슬픔과
노을이 주는 인생의 마지막 아픔을 그림에 담은 뭉크...
마치 세상의 슬픔의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공감되어 귀를 막는 뭉크...
엄마를 6세 때 잃고 누이와 동생의 죽음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가 무너져 가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했던 뭉크...
자신마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와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뭉크를 이해했다고 말하지 못하리라.
보여지는 찰나의 순간을 담으려 했던 인상주의에... 부족함을 느끼고...
감정과 감동, 마음을 담아내려고 했던 뭉크...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제 뭉크의 그림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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