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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리뷰

총,균,쇠 (GUNS, GERMS, AND STEEL): 제1부 인간 사회의 다양한 운명의 갈림길.

by onyuan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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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세계의 대륙, 지역, 인종의 불평등은 왜 발생하게 되었는가?

  1972년 7월 생태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조류의 진화를 연구하러 뉴기니 섬에 머물 때 문득 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유럽과 동아시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세계의 부와 힘을 독점하고 있고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의 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은 침략자들에 의해 사라지거나 노예의 삶을 살았고 인종차별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와 힘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분포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에 대한 물음을 던진 생태학자가 자신의 경험과 학습한 지식들에 근거한 생각을 저술한 책이 바로 총, 균, 쇠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물음을 던져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 역시 인류의 역사, 세계사를 공부했지만 발생했던 역사적 사실들에 초점을 맞추어져 흥미로워했을 뿐 대륙으로 흩어진 인류의 여러 친척들이 문명의 큰 격차를 왜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질문을 던져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환경, 정치, 경제적인 요인들이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피엔스처럼 이 책 역시 한 개인이 너무나 방대한 내용을 다루다 보니 각 분야의 전문가 수준의 깊은 지식이나 성찰이 고려되기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던진 질문과 해석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통찰을 주기에 충분하니 많은 도움 받으시길 바랍니다.

 

제1부 인간 사회의 다양한 운명의 갈림길

 

 제1장 문명이 싹트기 직전의 세계 상황

  각 대륙에 인간이 뻗어나가 살기 시작한 시기가 제각기 달랐던 것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B.C 11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조상들을 상상해 보며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을 예측해 보자.

 B.C 11000년경을 출발선으로 잡은 이유는 이 시기에 인류는 드디어 지구의 모든 대륙으로 뻗어나갔으며 촌락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류가 지구의 모든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시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도착한 남아메리카와 인류가 탄생하여 생활하기 시작한 시기의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인류의 기원을 아프리카로 확정한다면 B.C 700만 년 전이다. 그리고 인류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5~600만 년을 지낸다. 이 시기 인류의 조상은 고릴라, 침팬지, 인간으로 종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인류는 계속 진화해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등으로 진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 인류와 가장 유사해진 것은 호모 에렉투스 때부터였다. 그렇게 아프리카에 국한되어 있던 인류는 B.C 180~100만 년 경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벗어나 동남아시아로 진출해 자바섬에 화석을 남겼다.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화석은 50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 유럽과 아시아는 하나의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100만 년 넘는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것이라고는 몇 안 되는 유골과 석기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또 언제 어디에서 또 다른 유골이나 물품들이 발견되어 우리에게 힌트를 줄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이렇게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 시기에는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생존 능력과 배를 만들어 오스트레일리아나 아메리카로 건너갈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이외에는 인류가 살고 있지 않았다.  이후 50만 년 전까지 아프리카와 서유라시아에서 분리되어 살아온 인류는 세부적인 골격들이 달라졌으며 유럽과 서아이사에 살았던 인류를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분류한다. 

  그러다 마침내 약 5만 년 전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위험한 동물은 사냥하지 못했고 물고기조차 잡을 만한 도구를 만들지 못했던 인류는 갑자기 대약진을 하게 된다. 크로마뇽인이 등장하면서 바늘, 송곳 등의 도구들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작살과 투창기 등의 무기도 만들었고 나중에는 활과 화살까지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인류는 큰 짐승, 물고기, 조류까지 사냥할 수 있게 되었고 장신구를 만들고 동굴벽화 등의 예술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 그들의 능력에 분명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대약진의 이유로는 언어의 발달이 시작되면서 창의성을 구현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발달을 먼저 시작한 호모 사피엔스가 퍼져 나가 확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약진이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각각 발생될 확률이 적으며 유럽에 먼저 진출해서 수십만 년을 독차지하고 있던 네안데르탈인들이 4% 정도의 유전자만을 남긴 채 모두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대약진을 한 인류는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를 넘어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들과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진출하게 된다. 여러 증거들을 봤을 때 3만~4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빙하기로 세계의 해수면이 현재보다 수 킬로미터나 낮았다 하더라도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려면 80Km의 해협을 건너야 했고 눈으로는 식별되지 않는 미지의 섬이었기에 조난당한 이들이 정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뉴기니에 인류가 살기 시작했을 때 주변 섬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인류가 살았던 증거가 나오자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 처음으로 인류가 배를 사용했다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인류가 새로운 땅에 도착하자 대형동물들이 멸종을 맞이했다. 당시 거대한 캥거루도 있었고 소 정도 크기의 코뿔소를 닮은 디프로토돈트와 표범 등도 존재했었다. 1톤이나 되는 도마뱀, 거대한 뱀, 악어 등 대형 파충류들도 있었는데 모두 멸종하고 만다. 그리하여 인간을 위협할 수 있는 대형동물과 가축화가 될 만한 대형 야생 동물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인류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마지막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가게 된 남극대륙은 예나 지금이나 자급적인 인구 집단이 살지 않으므로 제외시켰다. 인류가 아메리카로 언제 처음 이동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유적은 B.C 120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알래스카 유적이다. 그다음으로 B.C 110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유적들인데 현재 미국과 멕시코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들은 클로비스 유적이라고 부른다. 이후 인류는 남아메리카까지 내려가 남극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대륙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태평양과 대서양을 배를 타고 갔다고 보기보다는 북극 지역을 통해 알래스카로 이동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인류가 처음 도착했을 당시에는 오늘날의 아프리카 세렝게티 평원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코끼리, 말, 사자와 치타들이 살았으며 거대한 육지나무늘보와 낙타와 같은 이국적인 종도 많았다. 그러나 아프리카와는 달리 이곳의 대형 포유류들은 대부분 멸종하고 말았다. 멸종된 대형 포유류의 뼈들이 많이 발견되어 이곳에 살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아프리카에서처럼 왜 살아남지 못했을까? 빙하기가 끝날 때 기후 변화를 이겨내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인간을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대형 포유류들이 인간을 피하지 않아 멸종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상황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각 대륙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시기가 다른 것이 각 지역의 역사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 인류가 살아온 시간으로 문명의 발달을 이야기한다면 아프리카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아프리카는 다른 대륙보다 500만 년이나 일찍 인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먼저 살기 시작한 것은 문명의 발달과는 큰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이제 다른 원인을 찾아보자.

 

제 2 장 환경 차이가 다양화를 빚어낸 모델 폴리네시아

  폴리네시아는 환경과 관련하여 인간 사회가 다양화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러나 여기서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폴리네시아를 통해 다른 대륙도 그러한 변화를 겪었으리라는 개연성뿐이다. 과연 다른 대륙에서 다양화를 야기시킨 환경적 차이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를 밝혀보자.

  뉴질랜드 동쪽 800km 정도 떨어진 채텀 제도에서 수세기에 걸쳐 살아오던 모리오리족은 1835년 12월에 갑자기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다. 총과 곤봉, 도끼로 무장한 마오리족 900명이 배를 타고 모리오리족이 사는 섬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마오리족은 자신들의 관습대로 모리오리족을 닥치는 대로 여자, 아이까지 마구 죽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했던 모리오리족은 반대로 대표자 회의를 열어 평화롭게 해결하는 전통을 따르려고 하였다.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은 모두 1000년 경 뉴질랜드로 이주해 온 폴리네시아 농경민의 후손들이었다. 북섬에 정착한 마오리족은 복잡한 기술과 정치적 조직을 발달시켜 왔고 모리오리족은 기술과 정치적 조직력을 발달시키지 않고 평화롭게 수렵 채집을 하며 살아온 것이다. 전혀 다르게 변화한 두 문명의 충돌은 잔혹한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와 유사한 일들은 인류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은 왜 정반대의 방향으로 발전했던 것일까?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의 역사적 사건은 인간 사회에 환경이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데 아주 좋은 사례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기간에 걸친 소규모의 자연 발생적 실험이 진행된 것이다. 뉴기니와 오스트레일리아 동쪽 태평양에는 수 천 개의 섬이 각기 다른 면적, 기후, 지질적 자원이 다른 채 존재해 있다. 이곳으로 인간이 점차 퍼져 나가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모두 폴리네시아인으로 문화와 언어, 기술 등을 공유하던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환경이 인간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볼 수 있다. 

  채텀 제도에 뿌리를 내린 모리오리족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었을까? 처음 이주한 이들은 농경 생활을 했었는데 채텀 제도는 한랭한 기후로 열대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수렵 채집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수렵 채집은 저장할 잉여 농산물이 없으므로 재산을 축적하지 못해 군대, 관료 등을 운영할 수 없었다. 채텀제도는 비교적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수렵채집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구가 2000명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서로 협력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수렵채집을 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고 외부의 침략도 없는 평화로운 외딴섬들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무기도 발전시킬 필요가 없었다. 모리오리족은 그렇게 평온하게 자신들만의 집단을 형성해서 나름의 규칙 안에서 평온하게 살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폴리네시아에서 가장 큰 섬들인 뉴질랜드의 따뜻한 북부는 농업 하기 적합한 환경이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잉여 농산물의 축적을 통해 경제력을 키워 나갔고 이 결과 인구를 10만 명 넘게 만들었다. 인구밀도가 높아지자 이웃 집단 간의 전쟁이 자주 발생했기에 농업에 필요한 기술과 함께 전쟁에 필요한 무기 또한 발전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 사회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고 인구밀도가 높았던 뉴질랜드 마오리족에게 먹을 것이 풍부한 채텀 제도의 소식은 반가웠을 것이다. 게다가 그곳에 사는 이들은 전쟁을 할 줄 모른다고 하니 얼마나 탐나는 곳이었을까.

  폴리네시아의 수많은 섬들 중 인간이 살 수 있는 모든 섬으로 폴리네시아인들이 이주해서 살았으며 각기 다른 환경과 조건 속에서 각자의 문화, 정치, 사회, 경제를 이루며 살았다. 인구는 경제의 규모와 생활 가능한 육지의 면적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인구의 규모는 정치, 사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구가 많을수록 정치, 사회는 복잡해졌고 문화는 다양해졌다. 그리고 이들은 섬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이렇다 할 금속 매장량이 없었기에 철, 금속을 다루는 수준의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다양한 문명과의 만남과 충돌이 없이 고립되어 수 천 년을 살다 보니 문자, 언어, 지식의 축적도 이루지 못했다. 뉴질랜드에는 구리와 철이 있었기에 언젠가는 자체적으로 금속을 다룰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대륙의 문명들이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렇게 폴리네시아는 환경과 인간 사회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대륙에서도 환경적인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문명을 이룩해 냈으며 지금의 현재의 세계적 상황이 연출되었을까?

 

 제3장 유럽이 세계를 정복한 힘의 원천

  3장에서는 유럽이 세계를 정복하기 시작한 시기에 가장 중요했던 사건을 다룬다. 근대사에서 가장 큰 충돌이었고 충격적인 결과를 남긴 만남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스페인의 피사로 부대와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의 만남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카리브해의 여러 섬들을 발견하면서 세계는 대격변의 시대를 열었다. 대서양을 건너 미지의 땅이 있으며 그곳에서 부와 명예를 얻을 기회를 발견한 유럽인들은 적극적으로 대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1532년 11월 16일 남아메리카 페루의 고지대 도시인 카하마르카에서 역사적인 사건의 두 주인공이 만났다.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는 스페인 부대원들에게 친구이며 형제로서 맞이하겠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속히 오라고 하였다. 8만 명의 인디언 병력이 주위에 포진해 있었고 수 천 명의 인디언들이 황제의 앞길을 보위하며 등장했다. 황제 옆에는 80여 명의 지위가 높은 추장들과 영주들도 함께 했는데 그들은 금과 은을 많이 지니고 있어서 놀라운 장관을 연출했다. 높은 가마 위에 앉아 있는 황제 아타우알파가 피사로를 맞이했다. 

  이때 피사로는 매복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카하마르카 광장 주변에 기병대를 둘로 나누어 기습할 수 있는 위치에 매복을 시켜  놓고 나팔 소리가 나면 총을 쏘며 황제에게로 진격하도록 준비시켰다. 그리고 보병 또한 일부는 매복시켜 기습공격 시 기병대를 돕도록 했다.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잉카의 황제는 여유 있고 느긋하게 피사로를 맞이했다. 피사로가 잉카의 황제를 만날 때 168명의 스페인 병사들은 엄청난 수의 잉카 병력 앞에 압도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심지어 오줌을 지리는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 신앙이 주는 힘이 있었다.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고 교회를 전파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며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사랑을 가장 큰 가르침으로 믿고 있는 교회가 가장 잔인한 모습으로 교회를 전파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인 것이다. 

  피사로는 양손에 십자가와 성경책을 들고 황제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스페인 국왕의 이름으로 자신들이 왔으며 이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아타우알파 황제는 손에 들고 있는 성경책이 무엇인지 보여달라고 했으나 펼쳐서 보는 것인지도 몰랐고 안에 쓰인 글은 더 알 수 없는 것이어서 휙 던져버렸다. 글자 피사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이고 매복해 있던 병사들에게 성스러운 전쟁의 시작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산티아고!'라는 함성이 울려 퍼졌고 방울소리를 요란하게 내는 기마병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던 스페인 병사들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성경을 무시한 행동에 흥분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만민에게 알리기 위해 온 우리의 임무는 선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 믿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천지를 울리는 총소리와 나팔소리, 함성 그리고 본 적 없는 말들의 진격, 갑옷과 칼과 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에 놀란 잉카인들은 겁에 질려 뒤엉켰으며 도망가려고 발버둥 치다가 질식해 죽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기병대는 광장세서 1.6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주둔하고 있던 잉카의 군대에 소식을 전하려고 하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 주위를 호위하고 있던 잉카의 군대는 대기만 하고 있었다. 그 사이 광장에 있는 대부분의 잉카인들은 죽었고 아타우알파 황제는 사로잡히고 말았다. 

  어떻게 소수의 스페인 병사들이 8만 명에 육박하는 원주민들을 이길 수 있었을까? 우선 전쟁 무기의 차이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잉카의 군사들은 돌, 청동기, 나무 곤봉, 막대, 손도끼, 물매가 전부였고 쇠칼을 막을 방패도, 갑옷도 없었다. 게다가 말과 총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전투의 결과는 수천 명, 그 이상의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스페인인들은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었다. 이해를 조금 돕자면 조선에서도 이와 유사한 가슴아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2차 동학농민운동 우금치 전투였습니다. 일본군의 조선 파병과 경복궁 장악 소식에 전봉준, 김개남 등의 동학농민들이 일본에 맞서기 위해 2차 동학농민운동을 전개했을 때였습니다. 이들은 우금치 전투에서 완패하고 말았는데 당시에도 2만이 넘는 농민들이 200여 명이 진두지휘한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지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은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었고 농민들은 비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당시 증언을 보면 사냥을 하듯 조선 농민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조선인을 지켜야 했던 관군은 조선 농민을 향해 총을 쏘거나 일본군을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무기의 차이와 전투 경험, 지식, 훈련 등의 차이가 이와 같은 비극을 낳았습니다. 조선 관군과 일본군은 미국에서 수입한 500m 이상의 사거리를 가진 기관단총을 가지고 죽창과 1분에 겨우 1~2발을 쏘며 사거리도 50m밖에 안 되는 화승총을 가진 농민들을 작은 희생도 없이 몰살시켰습니다. 잉카의 군대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스페인 군대를 이길 수 있었으려면 스페인 군대의 정보를 바탕으로 고도의 방어 훈련을 하고 스페인 군대가 가진 말과 총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지리적 요소를 충분히 활용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168명 밖에 되지 않는다 하여 지나치게 자만하였고 무방비 상태 그들을 맞이했으니 참혹한 참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두 번째 원인을 찾아보면 아메리카 전 지역에 천연두가 유행해서 95%나 되는 인구가 감소한 것이다. 그들에게 전염병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현대에도 치료약이 없는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큰 가를 보면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전염병으로 인해 황제를 계승할 왕자들이 죽었고 그 자리를 두고 내전을 벌인 상황이 스페인 군대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약점으로 판단된다. 네 번째는 문자의 존재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스페인은 문자를 통해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남아메리카에 대한 정보를 알고 왔지만 잉카인들은 외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고 문자가 없으니 정확한 의사소통, 명령 등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식을 축적해서 자신들만의 문화, 문명, 과학기술 등을 발전시키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아메리카 전역에서 1만 년 넘게 살아온 이들이 대부분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그들의 문명도 끝이 나고 말았다.

  잉카제국의 멸망은 안타깝지만 그들의 순진함과 무지함, 교만에 기반한 자만심이 부른 참사를 어떻게 봐야할 지 마음이 복잡합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역사가 생각납니다. 잉카보다 규모가 컸던 아즈텍도 스페인에 맞서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1519년 11월 8일 피사로와 7촌 친척이었던 에르난 코르테스가 황금을 찾아 아즈텍 제국의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했고 거대한 제국을 너무나 손쉽게 장악해 버렸습니다. 아즈텍의 무테수마 황제는 피부가 흰 색인 신의 사자가 온다는 예언에 기초한 종말론을 믿고 있었고 실제로 비슷한 코르테스가 도착하니 정말 어이없게도 신의 사자로 여기고 왕권을 내놓고 자진해서 사로잡혔습니다. 물론 외부인들에 의해 퍼진 전염병에 대한 공포감, 낯선 존재에 대한 신비감이 있었겠지만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10척의 배에 스페인 600명과 쿠바 인디언 300명, 말 10여 필, 대포 10문으로 거대한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살아서 돌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코르테스의 부하들이 아즈텍의 전통 축제를 반란 음모로 오해해 무자비한 살해만 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손쉽게 엄청난 황금과 보석, 명예를 얻었을 텐데 그 사건이 터진 이후 아즈텍인들의 분노를 사 이른바 슬픈 밤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스페인 병사들의 무자비한 모습을 본 아즈텍인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들을 공격했고 900명의 원정대 중 800여 명이 사망하는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코르테스는 그날의 전투에서 손가락 2개도 잃고 전리품을 거의 챙기지 못한 채 겨우 후퇴했습니다. 그러나 아즈텍 제국은 이미 하나의 통합된 힘을 발휘할 정치적 힘을 잃어 1521년 5월 전열을 가다듬고 900여 명의 군대를 모아 다시 공격한 코르테스에게 완전히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메리카에서 자리를 잡고 문명을 만들었던 이들은 신기할 정도로 유사하게 멸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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