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가축의 치명적 대가, 세균이 준 사악한 선물
2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류의 문명은 각 대륙의 환경적인 조건에 의해 불균등한 속도로 발전해 왔다. 농업이 발전하기 유리했던 지역의 민족들은 식량 생산의 힘으로 인구가 증가할 수 있었고 인구의 증가는 정치 체제를 필요로 했으며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는 유능한 엘리트들을 양성해 문자, 도구와 기구 그리고 무기들을 발전시켰다. 이로 인해 각 대륙의 민족들은 힘과 부의 차이를 보였고 누군가는 지배했고 누군가는 지배당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라시아의 신대륙이 구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던 더 큰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근대사에서 주요 사망 원인은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 말라리아, 페스트, 홍역, 콜레라 같은 여러 질병들이며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세균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세균들 역시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의 산물이며 그들도 살아남기 위해 진화해 왔다. 진화의 과정은 가장 효과적으로 새끼를 낳아 그들이 살아기기에 적합한 장소에 전파시킬 수 있는 개체들을 선택하여 살아남는 것이다. 이때 잘 전파되는 세균일수록 더 많은 새끼를 남길 수 있으며 살아남는데 유리해진다. 그러므로 세균은 전파하기 좋은 숙주를 선택하고 그 숙주의 환경에 맞게 스스로 변화를 시도하여 개조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전파할 때에는 세균들마다 방법이 다양하다. 어떤 세균은 수동적으로 잡아 먹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옮겨가며 숙주의 신체를 자극하여 침이나 피부의 변화를 일으켜 적극적으로 다른 숙주에게로 이동한다. 숙주의 입장에서는 설사, 기침, 피부질환, 음식을 섭취하는 행동일 뿐이지만 세균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영리한 전략인 것이다. 그리고 모기, 벼룩, 이, 체체파리 등과 같은 생명체들을 이용해서 다른 숙주에게로 이동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진화하는 세균들에게는 인류가 이동하지 않는 정주형 농업 사회로 변화하고 집단을 이루어 도시를 건설해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아주 좋은 환경을 얻게 된 셈이었다. 숙주들이 늘 곁에 있어주었고 새로운 숙주들이 태어나 주니 세균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또 하나의 멋진 환경이 조성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도시와 국가 간의 교역이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이제 세균들은 인간이 만든 교통수단을 무임승차하여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립되어 각자 살아온 대륙으로 팽창하기 전에는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유라시아만이 각종 세균들이 마구 뒤섞인 도가니가 되어 많은 세균들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류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었다. 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면역을 가지게 되었고 이 전쟁을 통해 세균들도 진화해 더욱 치명적인 전염성을 보유하게 되었다.
신대륙의 기회를 찾아 떠났던 이들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자신들이 보유한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고 무서운 무기를 가득 탑재하여 갔던 것이다.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으며 원주민들의 95%, 아니 100%까지 몰살시키기도 했다. 실제로 히스파니올라 섬에 콜럼버스가 1492년에 도착했을 때 800만 명이나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대규모 전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1535년 원주민은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아즈텍, 잉카 말고도 미국 미시시피 강 유역에도 거대한 제국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곳은 1540년 에르난도 데 소토의 탐험대가 다녀오기만 했는데 1600년대 말 이 지역을 다시 방문했을 때 소수의 원주민들만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고학적 자료들을 자세히 검토한 결과 2000만 명에 육박하는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재방문했을 때에는 겨우 100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원주민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재앙과 같았던 세균의 전염이 없었다면 각 대륙의 역사는 전혀 다른 결과를 보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신대륙의 침략에 강력하게 맞설 수 있었던 거대한 제국들이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무너져 버렸으니 그들에게 세균은 현재의 핵무기와 같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한 가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너무나 치명적인 전염병이 유라시아에서 신대륙으로만 전해졌을까? 신대륙에서는 강력한 전염병이 없었을까?
전염성이 강한 세균은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들 사이에서만 서식하며 그들 속에서 진화한다. 그런데 남북 아메리카에서는 가축화를 할 만한 동물종 자체가 별로 없었다. 멕시코와 미국 서남부에는 칠면조, 안데스에서는 라마와 알파카 그리고 기니피그, 남아메리카의 사향물오리가 전부였고 전세계 어디서나 길렀던 개까지 합쳐서 5종만이 가축화되어 인간과 살았다. 그리고 기후의 차이, 이동이 쉽지 않은 지형과 밀림 등의 이유로 서로 소통하고 교역하며 살지 않아서 유라시아처럼 세균들의 도가니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침입자들을 전멸시킬 만큼의 강력한 전염병은 아니었지만 강력했던 질병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열대지방의 말라리아, 동남아시아의 콜레라, 아프리카의 황열병은 유럽인들이 식민지화할 때 가장 심각한 장애물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신대륙에서 살아온 자신들을 거의 몰살시킨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발진 티푸스, 페스트, 결핵 등에 비하면 그 파괴력은 너무나 큰 차이를 보였다.
이 사실들을 보면 세균이 인류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은 자신의 욕심과 오해 등으로 셀수 없이 많은 전쟁을 하며 서로를 죽여왔지만 세균이 역사가운데 인간을 죽인 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인간끼리의 전쟁으로는 거대한 제국을 모조리 몰살시킬 수도 없었다.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세균의 개입과 세균과 인간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꼭 참고해야 할 것이다.
제 12 장 식량 생산 창시와 문자 고안과의 밀접한 연관
지배하게 된 문명과 지배받게 된 문명의 운명을 가른 것 중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문자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민족들이 주장하는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문자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가. 문자는 근대화된 사회에 힘을 가져다주었다. 문자는 수많은 정보를 무엇보다 정확하고 자세하게 전달할 수 있게 해 준다. 문자의 힘은 생각보다 놀라워서 유라시아가 다른 대륙을 지배하게 된 여러 원인들 즉 농업, 인구 증가, 중앙 집권적 정치 조직, 세균, 무기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실제로 유럽의 식민지 개척 당시 원정에서 돌아온 이들이 작성한 해도와 항로, 탐사했던 곳에 대한 방대한 정보는 새로운 원정의 동기가 되었고 더 잘 준비해서 출발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문자를 잘 발달시킨 민족이 있는가 하면 충분한 규모의 제국을 건설하고도 문자를 개발하거나 발달시키지 못한 민족이 있을까?
역사상 가장 오래 전에 독립적으로 문자 체계를 만들어 내어 사용한 이들은 유라시아 대륙에 속한 수메르인들이었다. B.C 3000년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이 최초로 문자를 사용하였고 그 뒤를 이어 인접해 있는 이집트에서 B.C 3000년 이후에 이집트 문자를 사용하였다. 아마도 메소포타미아의 설형 문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흘러 B.C 1300년이 되어서야 중국에서 독자적인 문자를 개발했는데 독립적으로 만들었거나 수메르인의 문자가 전해져서 자극을 받아 개발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B.C 600년 경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인디언들이 독립적으로 문자를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이렇게 독립적으로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3~4곳이 있고 전해진 문자에 자극을 받아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지역들이 한글을 포함해 13개가 존재한다.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이스터 섬에서 사용한 문자도 어디에서도 영향을 받기 어려운 지리적 위치 때문에 독자적으로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백만 년 동안 인류는 문자 없이 살았다. 그러다 불과 몇 세기의 간격을 두고 독립적으로 문자가 개발되어 사용된 것은 인류가 점차 대규모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문자가 절실하게 필요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 필요에 의해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와 아이디어들이 누적되면서 하나의 문자가 창조되었을 것이다. 초기의 문자는 정치 제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종교와 법, 사회 전반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의 문자가 완성되는데 최소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개발이 쉽지가 않다. 이 어려운 것을 해낸 문명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지배하는 문명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유라시아 지역은 수메르인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된 셈이 된다. 왜냐하면 유라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스스로 문자를 개발하지 못했지만 문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문자가 주는 혜택을 충분히 누렸기 때문이다. 반면 아즈텍과 잉카 문명, 오세아니아 지역까지는 기후와 지형의 장벽에 가려져 전해지지 못했다. 그 결과 지배받게 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제 13 장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배하게 된 문명과 지배받게 된 문명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바로 발명일 것이다. 차원이 다른 무기와 교통수단, 문자 등을 보유한 문명은 다른 문명과 충돌했을 때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발명의 기술들은 왜 각 대륙에서 전혀 다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었을까? 어째서 총과 포, 선박과 여러 철제 기계들은 유라시아인들이 먼저 발명하게 되었던 것일까? 철과 구리는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장 많이 매장되어 있는데 그들은 왜 활용하여 발전시키지 못했을까?
이 물음에 대해 발명의 영웅이론이 제시되었다. 즉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제임스 와트, 토머스 에디슨, 라이트 형제 처럼 극소수의 천재들이 세상을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구하는 일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임스 와트가 1769년에 증기 기관을 발명했다고 하지만 토머스 뉴커먼이 57년 전에 이미 증기 기관을 발명했었고 와트가 수리 작업을 하다가 아이디어를 추가한 것이다. 토머스 뉴커먼 역시 토머스 세이버리가 1698년에 증기 기관에 대한 특허를 얻은 것에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발명왕인 에디슨의 경우도 한 번 살펴보면 1879년 세상을 밝힌 백열전구도 사실은 1841년 다른 발명가들이 특허를 얻은 것을 개량했을 뿐이다. 지금의 과학 기술도 단 한 사람의 특출한 능력으로는 결코 새로운 진보를 이뤄낼 수 없다. 그러므로 천재 발명가에 의한 영웅이론은 좋은 해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창의성과 수용성을 어느 정도 갖추었는지가 문제였을까? 누군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물건을 제시했을 때 그것을 배척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다른 지역에서 전해져 온 기술들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자기들만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라서였을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라시아 지역은 대부분 창의적인 것을 권장하고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회이며 외부의 것을 잘 수용하는 열린 집단이어야 하고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것도 좋은 해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민족들 중에서도 전혀 다른 성격의 사회를 가지고 있으며 유라시아 지역의 국가들을 살펴보면 시대별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 때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기술과 외부로의 확장을 활발하게 했던 국가였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면서 전혀 반대의 성향을 보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아픈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다. 중국뿐인가? 이슬람 국가들 역시 중세에는 유럽으로 과학기술과 학문을 전파해 주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일본의 사례도 아주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총이 처음 전해졌을 때 일본은 큰 관심을 보였고 자체적으로 향상시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총을 만들었었다. 그러나 사무라이 계급사회의 정치적인 힘에 눌려 더 발전시켜 나가지 못했고 결국 서구 열강들에게 치명적인 굴복을 하게 되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외부의 무기, 문화, 사회 조직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제2차 세계대전 때 동북아시아에서 맹위를 떨쳤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들만을 보아도 어느 한 대륙의 모든 집단이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것 중 어느 하나만의 성향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물음이 있다. 과연 기술발전은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인류를 진보시켜온 수많은 기술발전은 인간 사회가 간절히 필요로 해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일부만 해당되며 사실 거의 대부분의 발명품들은 아직 사회에서 크게 쓸모가 없을 때 만들어졌다가 후대에서야 훌륭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한 사회가 어떤 발명품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그 기술로 인해 경제적인 이점이 있어야 한다. 유라시아에서는 바퀴의 발명은 혁신적인 이동수단의 발명품이었지만 멕시코에서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회적 가치관과 위신, 종교와 기득권 세력의 용인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발명품이라 하더라도 전혀 각광받지 못한다. 이러한 예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다루기도 어렵다. 마지막으로 특정 발명품이 활용되려면 그 발명품을 뒷받침하는 기반 시설과 기술들이 구축되어야 가능해진다. 이러한 조건이 맞지 않아 발명했을 당시에는 전혀 관심받지 못했고 발명한 당사자조차 실패한 것이라고 판단한 경우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발명은 필요에 의해서 진행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유라시아 지역이 다른 대륙보다 좀 더 나은 과학적 발전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식량 생산에 유리한 지리적인 요인과 특정 지역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발명되면 신속하게 전파되어 모방하거나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원동력으로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고 많은 인구는 탁월한 인재들이 태어날 확률을 높였다. 인구의 차이를 살펴보면 유라시아의 인구는 남북 아메리카의 6배, 아프리카의 8배, 오스트레일리아의 250배나 많았다. 그리고 비슷한 기후 탓에 서로 간의 이동이 용이하다 보니 교역도 많아졌고 치열한 전쟁도 자주 하게 되어 많은 발명품을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든 근거리에서 침략해 올 수 있는 다른 민족, 다른 국가가 있었기에 생명을 걸고 무기를 개발해야 했고 부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차지한 로마와 몽골의 대제국은 동양과 서양을 융합시켰고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전쟁 역시 유럽과 아시아의 기술들과 지식들이 혼합되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반해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는 심각하게 고립되어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살아왔다. 외부에서 모방하거나 자극받을 만한 그 어떤 발명품도 접하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만약 우주도 이와 같다면 아직 외부와 어떤 만남도 이루어지지 않은 지구가 고립되어 처참한 역사를 맞이한 대륙들의 역사를 맞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된다.
제 14 장 평등주의부터 도둑 정치까지
지배하게 된 문명과 지배받게 된 문명의 차이점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중앙집권적 권력 형태에 대해서도 반드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 후 서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가던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가게 되었다. 그때 지배하게 된 문명은 종교와 국가가 결합하여 무기, 문자, 병원균, 기술들, 종교를 가지고 새로운 문명 속으로 들어갔다.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종교는 국가와 긴밀하게 얽혀 대부분 힘과 무력으로 정복해 나갔고 결국 지배해 버렸다. 종교는 종교대로 믿음과 신앙을 이용해서 목숨을 걸고 침입하고 용맹하게 전투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조종했으며 국가는 국가대로 애국심을 자극하여 희생을 강요하였다. 종교와 국가는 개인적인 욕심에 대한 욕망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무모한 도전을 독려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사람들이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미지의 대륙으로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가 정보를 전달한 후 군인들이 침략하기도 하고 함께 가기도 했다.
그렇다면 국가와 종교는 왜, 어떻게 생겨나서 발전했을까? 초기 인류는 수십 명의 가족 중심으로 이루어진 무리 생활을 했었다. 적어도 4만 년 전까지는 모든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살았으며 11000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 그렇게 살았다. 무리 사회는 계급이 없는 평등주의 사회였다. 특별한 종교도 없었고 사유재산도 없었다. 식량 수급은 수렵 채집에 의존하였고 그로 인하여 이동형 삶을 살았다. 연구에 의하면 부족 조직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약 13000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다른 지역에서는 그보다 늦었다. 부족 사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모여 살기도 했는데 수백 명은 드물었던 것 같다. 구성원들 간의 갈등 없이 모두가 서로를 알고 지낼 수 있는 한계선까지만 유지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식량 생산 능력의 향상과 함께 부족간의 결합이 일어나며 점차 규모가 커졌고 추장 사회로 불리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놀랍게도 일부 독립적인 추장 사회는 20세기 초반까지 존재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추장 사회는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급속도로 사라져 갔다. 추장 사회 역시 부족 사회처럼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B.C 5500년 경에 가장 먼저 나타났으며 남북 아메리카에서는 B.C1000년 경 모습을 드러냈다. 인구는 부족 사회에 비해 월등히 많아서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기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도 많아졌다. 우선 낯선 사람들 간의 다툼과 살인을 막아야 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 부분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데 인간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들끼리도 원수가 되어 극단적인 행동들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두면 평화롭게 지내기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평을 호소하고 불만을 토로하며 다툼과 대립이 발생한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본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본성 때문일까.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다툼의 역사이며 결국 많은 인류의 종들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만이 최종 승자가 되어 살아남아 있다. 그래서 인구가 증가하게 된 시점에 강력한 중앙 집권적 권위체계가 등장했고 추장을 도와 공동체를 이끌어갈 관료들이 세워졌다. 이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고 많은 혜택을 누렸다. 희귀한 물품이나 사치품은 추장과 권력을 가진 관료들의 몫이었다. 추장은 공동체가 수확한 것들을 모두 거둬들여 저장해 두었다가 조금씩 재분배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하였다. 이때부터 비평등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일반 평민들이 이런 상황을 잘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우선 일반인들은 무장할 수 없게 하고 일부 엘리트 계급만 무장하여 관리하였다. 두 번째로 조세처럼 거둬들인 것들을 재분배해주면서 대중이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세 번째로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이데올로기와 종교를 만들어 정당화시키고 이를 대중들이 받아들이도록 교육시켰다. 이를 두고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도둑 정치'라고 표현했다. 추장이 마치 인간과 신의 중재자인 것처럼 꾸미고 의식도 거행하며 대중을 속였다. 그리고 신앙심을 고취시켜 결국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점차 종교는 제도화되어 갔고 추장과 종교는 하나가 되어 중앙 집권적 사회를 강화시켰고 부유함도 차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인류의 집단이 점차 커지자 더 많은 농경지가 필요했으며 더 많은 노예도 필요하게 되었다. 추장 사회 간의 교류도 있었지만 전쟁도 끊임없이 발생했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사회는 모든 것을 흡수했다. 이 과정이 반복되다가 드디어 국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여러 고고학적 근거를 보아 최초의 국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B.C 3700년 경 등장했으며 뒤를 이어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며 중앙아메리카에서는 B.C 300년경에 나타났다. 초기 국가에는 왕에 해당하는 명칭을 가진 지도자가 막강한 권력과 의사결정권을 독점했다. 추장 사회에 비해 중앙의 통제도 광범위해졌으며 전쟁을 통해 획득한 노예의 규모가 훨씬 컸다. 거대해진 국가를 위해 일할 정부 조직도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조세, 징병 등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관료들이 크게 증가하였다. 인구의 증가에 비례해 내부적인 갈등도 심해져 법률, 사법 제도, 경찰 등이 중요해졌고 법률은 성문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추장 때보다 국가의 왕들은 훨씬 더 신격화된 존재가 되었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특별 대우를 받는 존재였다.
국가는 규모가 커진 만큼 다양한 민족, 다양한 언어가 혼재되어 사용되었으며 이를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학교를 통해 통합된 교육을 실시해서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만들었으며 애국심을 고취시켜 기꺼이 국가를 위해 개인이 희생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종교를 주입시켜 여러 민족, 남과 여를 신앙심으로 뭉치게 만들었고 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했다. 왕은 신과 같은 존재이니 결국 둘 다 왕을 위해, 국가를 위해 일반 대중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잘 먹혀 들면 국가를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방법은 오래전에만 활용된 것이 아니다. 현재 국가들도 동일하다. 영국에서는 "국왕과 조국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으며 스페인에서는 "신과 에스파냐를 위하여"라며 애국심을 부추긴다. 아랍의 여러 국가들을 비롯하여 여전히 신정정치 체제를 구축한 국가들이 존재한다. 애국심과 신앙에 광적으로 도취된 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다. 그 예는 역사 속에서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장 자크 루소는 국가가 사회적 계약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하였지만 부족 사회들, 추장 사회들이 더 규모가 큰 국가를 이루어 사는 것이 낫겠다는 의견을 모아 자발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 어떤 국가, 제국도 평화롭고 고상한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적이 없다. 누가 자신의 권리와 주권, 자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는가? 정복당하거나 굴복당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왜 유라시아 대륙이 나머지 다른 대륙들을 지배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왔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의 형성을 살펴보았다. 결국 식량 생산과 이로 인한 인구의 증가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판단된다. 모든 생명체는 먹을 것이 풍부해야 개체수가 증가하며 개체수가 증가해야 집단의 힘이 강력해진다. 유라시아는 어느 대륙보다 식량을 생산하기 좋은 환경이었으며 대륙이 비슷한 기후를 가진 지역으로 넓게 펼쳐져 있어서 서로의 소통이 어느 대륙보다 활발했기 때문에 제국과 국가 형태로 빠르게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제국과 국가는 많아진 인구를 통제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었고 외부의 침략에도 대비해야 했고 힘을 키워 확장하면 노예와 땅 등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유라시아는 이 용광로와 같은 과정을 다른 대륙보다 많이 겪으면서 성장해 나갔기에 다른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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