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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리뷰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 4부 : 인류사의 발전적 연구 과제와 방향

by onyuan 202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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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부터 3부까지 알아본 바와 같이 인류가 지구의 각 대륙으로 뻗어나가면서 생존에 유리한 지역을 찾아 나서기도 하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도 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각각의 문명을 펼쳐나갔다.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온 역사의 시간을 기준으로 본다면 최근에서야 지구의 형태도 알게 되었고 다른 대륙의 존재, 그곳에 사는 낯선 모습의 인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문명의 만남은 아름답고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충돌과 전쟁으로 이어져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너무 일방적인 것에 의문을 가진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해답을 제시했으며 서로 다른 대륙의 문명이 충돌하여 만든 결과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4부에서는 최근까지 가장 원시적인 삶을 유지해온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내용과 함께 유럽인들이 확장해 나간 모든 대륙은 그들의 서직지가 되었는데 유독 흑인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아프리카에 대해 보충 설명을 했다. 그리고  한 때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힘을 가졌던 중국이 유럽보다 먼저 세계 각 대륙으로 진출하지 못한 이유 등을 살펴본다.

 

  제 15 장 대륙 간 불균형 이론과 원주민들이 낙후된 원인

  대륙 간의 문명과 기술적 차이가 커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 테즈메니아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모든 대륙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이었던 곳이었기에 그 원인을 알아보고자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부가 아닌 다른 여러 지역을 여행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곳이 얼마나 척박한 대륙인지 알 것이다. 이곳은 단연코 가장 척박한 대륙이며 기후도 종잡을 수 없고 생태학적으로도 가장 빈약한 곳이다. 예측하지 못한 가뭄이 몇 년씩이나 지속되기도 하고 때론 엄청난 비가 쏟아져 곳곳이 물에 잠기기도 한다. 이런 곳에서 인간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으며 그 결과 모든 대륙을 통틀어 가장 특이한 인간 사회가 존재해 있었고 인구도 가장 적었다.

  인구가 적었기에 문명이라고 하는 특징들, 즉 농경, 목축, 금속, 건물, 문자, 제국이나 국가를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살아온 유일한 대륙이었다. 이곳을 처음 다녀간 프랑스 탐험가는 "이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자들이며 짐승에 가장 가까운 인간들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외모도 독특하여 이들이 바로 유인원과 인류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여기기도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철광석, 알루미늄, 구리, 주석, 납, 아연 등의 매장량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사는 문제를 좀처럼 해결하기 어려웠고 그로 인해 인구는 증가하지 못했으며 전문 기술자나 여러 전문분야의 인재 양성이 이루어지지 않아 자원을 전혀 이용하지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남쪽에 위치한 테즈메니아는 오스트레일리아보다 더 발전하지 못했다. 1624년에서야 유럽인들이 이곳을 발견했는데 그 어떠한 기술적인 도구도 갖추지 못한 원시 사회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불도 피우지 못했고 물고기를 잡아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뉴기니는 그나마 동남아시아와 인접해 있었고 강도 있고 고산지대의 기후가 생명체들이 살기에 적절하여 가장 발전해 있었지만 다른 대륙에 비하면 열악한 수준이었다. 

  이처럼 기후 조건과 외부와의 단절은 모든 생명체 중 유독 인간에게 큰 차이를 보이게 한다. 이것은 현대 사회를 들여다 봐도 알 수 있다. 풍요로운 선진국에서 잘 먹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회에서 인재들이 양성된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타고난 재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대륙 간의 불균형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 테즈메니아를 살펴보았는데 기후조건이 인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 수 있는 예라고 생각된다.

 

제 16 장 동아시아의 운명과 중국 문화의 확산

  유라시아 대륙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동아시아를 이해하려면 중국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독립적인 식량생산을 초승달 지대와 함께 세계 최초로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히려 더 빨랐을 수도 있다. 중국의 북부와 남부의 기후가 달라 북중국 최초의 농작물은 가뭄에 강한 기장류였고 남부는 벼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돼지, 개, 닭을 가축화했으며 이러한 식량생산 방법들은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식량생산의 힘에 의해 정착하여 살아가게 되었고 인구 또한 증가하였으며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의 출현도 빨랐다. 중국 최초의 세 왕조인 하, 상, 주 왕조는 B.C 2000~1000년에 탄생했다. 그리고 중국의 정치적 통일의 절정을 이룩한 진왕조가 B.C 221년에 등장하여 중국 전체를 하나의 국가로 인식시키게 하였다. 그러다 보니 B.C 2000년 전에 청동 야금술이 시작되었으며 B.C 500년경에 세계 최초로 주철 생산을 시작했다. 이후로도 종이, 나침반, 외바퀴 손수레, 화약 등 인류의 발전에 혁신을 일으킨 많은 발명품들을 내놓았다. 모든 부분에서 앞서 나간 중국의 각종 문물들은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그 영향을 받은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가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주변 국가들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현재 단일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거대한 국가를 이룬 미국, 러시아는 겨우 지난 100년 사이에 형성되었다. 이에 반해 인구도 가장 많으며 영토도 4번째로 넓은 중국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초대형 국가를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시기에 탄생시켰다.  비결은 바로 평탄한 지형과 긴 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지형도 험난하고 각 지역을 이어주는 강이 없어서 하나의 세력이 확장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으며 초기 문명지 중 하나인 이집트도 사막과 바다, 광야로 막혀 주변으로 확장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인 이유로 정치, 문화, 언어까지 거의 통일시켜 전혀 다른 여러 민족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했다. 중국에 비해 면적이 10분의 1도 안 되는 뉴기니에도 1000개에 이르는 각기 다른 언어가 생겼고 서유럽은 전혀 다른 언어들이 지역별로 발생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의 통일성은 지형적인 요인이 있었음에도 분명 특별하게 다가온다. 언어, 문자를 기반으로 한 문화적인 힘은 몽골이 중국을 차지하고 세운 원나라, 만주족과 여진족이 세운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조차 중국이라고 하는 국가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통일성은 여러 방면에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 주었고 인류 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했다. 세계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 수 없는 특별하고 거대한 중국이 정치와 사상적인 이유로 세계로 뻗어나가지 못한 것이 현재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제 17 장 동아시아와 태평양 민족의 충돌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 지역에 살고 있던 이들이 이주해 온 이들로 완전히 교체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일부지역, 호주 등으로 이동하여 현지인들을 거의 소멸시키고 자신들이 그 지역에서 거주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도 이와 같은 일이 태평양 지역에서도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략 4만 년 전 아시아로부터 인도네시아, 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의 여러 섬들에 이주해서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남중국 해안에서 다시 한 번 남쪽 섬들로 이주를 하였다. B.C 1600년 경 거대한 인구 이동이 있었는데 이를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팽창'이라고 한다. 중국 본토에서 출발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이주하였고 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 중 가장 외딴섬 그리고 아프리카 옆에 위치한 마다가스타르섬까지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몰아내거나 몰살하여 자신들로 교체하였다.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현재의 오스트로네시아 일대에서 발견된 것들을 추적해보니 타이완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 타이완으로 이주한 이들은 배를 건조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으며 바다를 건너는 해상 기술을 습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간석기, 토기, 농경과 가축 등의 선진 문명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유를 정확하게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놀라울 만큼 넓은 바다로 확장해 나갔으며 앞선 문명의 힘으로 도착하는 곳마다 원주민들을 거의 소멸시키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동쪽으로는 아메리카 근처에 위치한 이스터섬까지 뻗어 나갔으며 서쪽으로는 마다가스카르까지 확장해 나갔다. 정말 놀라운 팽창이 아닐 수 없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고고학적 증거와 함께 언어학적 증거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으니 언어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책을 보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강력하게 확장해 나간 오스트로네시아인들도 넘지 못한 섬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뉴기니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뉴기니는 적도 부근에 위치했지만 고산지대가 많아서 생명체가 서식하기 좋은 고지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일찌감치 독립적으로 식량 생산을 할 수 있었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인구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었고 문명도 발달해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도착했을 때 뉴기니 원주민들과의 경쟁에서 그들은 유리한 점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뉴기니 원주민들은 오스트로네시아인들과 접촉만 있었을 뿐 간석기조차 갖지 못한 수렵 채집인들이 살고 있던 인도네시아나 태평양의 여러 섬들처럼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완전히 사라지는 일을 겪지는 않았다. 

  동아시아와 태평양 일대의 인류 역사와 사회를 보면 환경이 역사를 형성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감당했는지 잘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유럽의 대항해 시대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 시대에 동아시아에서 출발해 놀랍도록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던 섬들까지 확장해 나간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팽창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제 18 장 남북아메리카가 유라시아보다 낙후됐던 원인 

  지난 1만 3천 년 동안 일어났던 인구 교체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시작된 인구 교체였다. 이 원인에 대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살펴보았지만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다시 한번 정리해 놓았다. 현대의 사회에서도 경쟁이 심하고 취업이 어려워 먹고사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결혼을 기피한다.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를 포기하거나 적게 낳는다. 모든 생명체는 살기 좋은 환경과 먹을 것이 충분해야 번성한다. 그중 지능이 발달한  인간은 환경이 뒷받침되면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아메리카 지역이 유라시아보다 낙후되었던 원인 중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바로 식량 생산 환경이었다. 유라시아에는 작물화 할 수 있는 식물들과 가축화할 수 있는 야생 동물들이 아메리카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유라시아에는 단백질이 풍부한 곡류들이 다양했으나 아메리카에는 단백질이 부족한 옥수수 정도에만 의존해야 했다. 안 그래도 식량으로 삼을 만한 작물이 부족한데 가축화할 동물마저 거의 없었다. 대형 포유류는 라마와 알파카뿐이었으며 이마저도 안데스와 페루 해안 정도에 국한되었다. 그래서 가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많은 혜택을 받지 못하니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축은 고기와 젖, 털, 가죽도 제공하며 물자를 운송해 주었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땅을 경작하는 동력도 공급해 주는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게다가 전쟁이 발생했을 때 큰 역할을 감당하며 초라할 정도의 침입자들이 가지고 온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도 갖출 수 있게 해 주었을 것이다. 당시 아즈텍인들과 잉카인들을 몰살시키다시피 한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페스트, 결핵, 발진티푸스, 콜레라, 말라리아 등은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질병들인데 이것이 전부 가축을 통해 전파된 것이었다. 그러니 만약 아메리카에서도 유라시아처럼 가축을 많이 길렀다면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가축화를 포함한 식량 생산의 환경이 유라시아에 비해 열악했던 아메리카는 이후 기술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더디게 발전하게 되었다. 아메리카는 구리, 은, 금, 합금 등으로 장신구는 만들었지만 여전히 돌과 나무와 뼈가 주된 도구였기에 강철로 만든 칼, 창, 단검, 대포, 총, 갑옷으로 무장한 스페인 군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리고 정교하고 강한 물질들을 다루게 된 유라시아는 대형 범선을 제작할 수 있게 되어 바다를 항해하게 되었다. 

  기술은 더 규모가 큰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게 했으며 복잡해진 사회는 다양성과 정치, 경제, 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경제의 발달은 국가가 나서서 신대륙 개척을 지원하게 했으며 개인들은 국가가 심어준 애국심과 부를 향한 열정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다. 그리고 복잡해진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문자가 개발되어 각종 정보와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사회의 발전에 엄청난 동력 자원이 되었다.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인류는 겨우 B.C 12000년경 알래스카를 통하여 아메리카로 이동하였고 지속적으로 남하하여 B.C 1만년 경 남아메리카 최남단까지 도달했다. 이후 1만 3천 년 동안 대륙간의 소통이 끊어진 채 각자 살아가다가 A.D 1000년~1350년에 최초로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북아메리카로 넘어갔다고 하는데 남아있는 흔적은 없다. 아마 당시의 기술과 조직력으로는 북아메리카인들을 상대할 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잠깐의 외부인과의 접촉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아메리카로 이주한 이들은 그곳에서 살 방법을 찾았고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주어진 환경의 벽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유라시아 인들이 다른 대륙의 인류보다 우월해서 더 빠른 발전을 이뤄냈고 다른 대륙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 19 장 아프리카는 왜 흑인 천지가 됐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프리카 원주민이라고 하면 곧 흑인을 떠올리며 아프리카 하면 유럽의 식민지와 노예무역의 당사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등으로 끌려간 노예들이 대부분 흑인이었고 영화, 드라마에서도 아프리카인들을 흑인으로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으며 모든 대륙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인류의 모든 인종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약 700만 년 전 우리의 먼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현생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도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각 대륙으로 팽창하면서 아프리카에는 흑인, 백인, 피그미족, 코이산족, 아시아 인종, 이렇게 주요 다섯 인종이 자리를 잡았다. 이중 흑인, 피그미족, 코이산족은 아프리카에서만 살았고 백인과 아시아 인종은 세계 각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A.D 1400년경 백인은 북아프리카에 자리를 잡았으며 사하라 사막 아래쪽부터 중앙아프리카에는 흑인들이 주로 살았다. 그리고 흑인보다 피부색이 덜 검고 체구가 작으며 이마, 눈, 치아가 튀어나온 편인 피그미족이 수렵 채집을 하며 중앙아프리카에 흩어져 살았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가장 낯선 코이산족은 코이족과 산족으로 나뉘는데 아프리카 흑인들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피부색은 누르스름하고 머리카락이 매우 곱슬이며 엉덩이가 크다. 코이족은 산족에 비해 체구가 크며 산족은 코이족에 비해 작다. 이들은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었는데 유럽인들에 의해 많이 사살되거나 감염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부시맨"이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이들이 바로 코이산족이다. 

  이 다섯 인종이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정보를 언어가 주고 있다. 스탠퍼드 대학의 위대한 언어학자 조지프 그린버그는 1500개나 되는 아프리카 언어를 정리했다. 그리고 그 언어들을 다섯 어족으로 분류해 아프리카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북아프리카에 살고 있던 백인들은 아프로아시아 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했고 이 언어가 유라시아 언어인 셈계 언어 즉 아람어, 히브리어, 아랍어의 토대였다. 중앙 서아프리카는 니제르콩고 어족, 중앙아프리카에는 반투 어족, 남아프리카에는 코이산 어족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아프리카가 왜 흑인 천지가 되었을까? B.C 3000년경 아프리카내에서 인종의 대이동이 있었는데 그때 흑인들이 확장했기 때문이다. 반투 어족이 서아프리카 내륙의 사바나에서부터 남하하여 피그미족과 코이산족을 몰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반투족은 중앙아프리카에서 남쪽으로 세력을 펼쳐 나갔는데 그 이유는 북쪽은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와 사하라 사막 등의 기후와 지형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투족의 팽창은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발생하기보다 교역과 결혼도 하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농경 생활을 하던 반투족은 수렵채집을 하던 코이산족의 영토를 점점 차지하였고 중앙집권적 사회가 아니었던 코이산족은 여기저기로 흩어지면서 거주지역을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북쪽 지역과 남쪽 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에 흑인들이 살게 된 것이다.

 

  에필로그 : 과학으로서의 인류사의 미래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왜 유럽에 추월당했을까? 이 지역은 세계 어느 지역보다 작물화와 가축화를 하기 좋은 환경이었기에 몇천 년이나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아시리아, 페르시아와 같은 제국이 탄생하면서 점차 숲은 농업을 위해 개간되었고 많은 수의 가축을 키우면서 땅은 점점 황폐해져 갔다. 더구나 이 일대의 강우량이 많지 않아서 회복하는 속도보다 자원의 기반이 무너지는 속도가 빨랐다. 생산력이 상실되자 힘의 방향은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B.C 4세기말 알렉산더대왕이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뒤를 이어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힘의 중심은 어느새 유럽으로 이동하였다. 영원할 것 같았던 로마가 멸망하면서 다시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힘의 이동이 일어났다. 

  여기서 동아시아의 중국을 살펴봐야 한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이렇게 소멸되었지만 이 지역과 비슷하게 작물화와 가축화를 이뤄내었고 대제국을 빠르게 건설한 중국은 왜 유럽에 추월당하게 되었을까? 중국은 지형과 기후, 생태학적으로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기에 세계를 정복하는데 상당히 유리했다. 그 결과물들도 상당하다. 주철, 나침반, 화약, 종이, 문자, 인쇄술, 항해술 등 수많은 문물을 어느 곳보다 앞서서 발명했으며 중앙집권적인 정치적 힘에서도 탁월했다. 그래서 15세기 초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선단을 인도를 지나 아프리카 동쪽까지 진출시킬 수 있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나 항해를 했으며 이 선단의 가장 큰 배는 길이가 자그마치 120m에 달했고 출정한 인원도 2만 8천 명이나 되었다. 콜럼버스의 보잘것없는 배 세 척, 바스코 다 가마의 배 세 척으로 신대륙을 점령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보다 앞선 중국의 대규모 항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중국도 만약 침략과 정복, 약탈을 목표로 삼았다면 현대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국 선단은 방문하는 곳에 중국 황제의 위상을 떨치고 선물을 하사하며 평화적인 방문을 했기에 돈과 권력에 사로잡혀 진출한 유럽과는 전혀 다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세계 최고의 국가였지만 선단 파견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아껴 넓은 대륙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권력이 중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중국은 선단 파견을 중단시켰고 조선소마저 해체해 버렸다. 이때부터 중국은 스스로 우물안의 개구리를 선택한 셈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떻게 이렇게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쉽게 바꿀 수 있었던 것일까? 중국의 지형적인 요소가 하나의 제국으로 성장하는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하나의 제국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쉽게 바뀌는 약점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유럽은 하나의 큰 강이 유럽 전역을 이어주지 않아 개별적인 국가들이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알프스, 피레네, 카르파티아, 노르웨이 국경의 산맥들은 여러 민족을 분할시키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래서 유럽은 서로 경쟁하며 성장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콜럼버스의 첫 대항해도 포르투갈 왕에게 거절당했고 메디나 세도니아 공에게도 거절당했으며 메디나 첼리 공에게까지 거절당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페인 국왕과 왕비에게 호소하여 허락을 받게 된 것이다. 만약 유럽이 중국처럼 하나의 제국이었고 그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거절한 여러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면 콜럼버스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물론 유럽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샤를마뉴대제, 나폴레옹, 히틀러 등 강력한 정복자들이 유럽을 통일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비해 중국은 거대한 세력을 막아줄 지형적인 요소가 부족해서 몽골이 중국 전체를 멸망시키고 지배한 적도 있었고 중국의 마지막 제국인 청나라 역시 여진족을 통합한 금나라가 지배했었다. 유럽에 비하면 정말 쉽게 정복되었던 중국이었다. 

  이밖에도 유럽에는 중국이 가지고 있지 않은 정치, 종교, 철학, 사상 등이 존재했기에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중국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웅크리고만 있었고 절대군주체제 아래에 경직된 사회를 구성했었던 반면 유럽은 기독교의 선교적인 신앙에 상인계급과 자본주의 시스템이 발달했으며 개인의 특허권도 보장해 주었다. 

  이 책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결국 인류의 역사는 환경적인 차이의 산물이다. 누군가는 개인의 영향력이 많은 부분 역할을 감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한 개인이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환경을 거슬러 거대한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알렉산더대왕, 칭기스칸, 예수, 석가, 레닌, 루터, 마호메트, 등의 위인들이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은 사실이지만 거대한 인류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정도일 뿐이다. 아무리 '거인 이론, 영웅 이론'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의 광범위한 흐름을 개인의 손에 좌우되었다고 주장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역사는 과학보다 인문학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역사야말로 진정한 과학이며 예측불가능한 분야이다. 왜냐하면 역사를 연구하다보면 결국 천문학, 기후학, 생태학, 진화 생물학, 지질학, 고생물학 등의 자연과학이 기반이 되며 이를 배제하고는 연구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결국 자연과학에서 시작되었고 진행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가 더욱 어려운 점은 실험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해 예측불가능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천문학 등과 같이 실험을 할 수 없는 학문이라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고 한 개인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는데 그 특별한 영향력이 언제 누구에게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학문은 인류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줍니다. 실험을 통해 결과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지는 못하지만 정해져 있지 않은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아주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하나의 학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덕분에 인류의 역사의 큰 흐름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고 현재의 나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대한 양의 책을 집필하고 인류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안목을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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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인가요? 이 근원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한 인류...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양을 도는 아주 작은 우주 별, 지구에 태어난 우리. 그 사는 이야기, 또는 삶을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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