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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리뷰

노량 :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

by onyuan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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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노량이 결코 마지막 전투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7년 후 정유재란.

 

기나긴 전쟁 속에서 한반도는 처참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순신의 영웅과 같은 대활약, 온 나라 백성이 모두 힘을 모아 일본에 저항했다. 거기에 명군의 투입으로 일본은 점차 힘을 잃어 갔고 급기야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사망하면서 철군을 유언으로 남기게 되었다. 일본 역시 얻을 것 없는 전쟁, 승리를 보장할 수 없는 전쟁에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조선 땅에서 모은 수많은 보물들과 포로(말이 포로지 인간을 사냥해서 가져가려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안전하게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다. 일본은 사천성(시마즈 요시히로), 순천성(고니시 유키나가), 울산성(가토 기요마사)에 성을 쌓고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철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천성과 울산성에 비해 순천왜성은 전라도에 위치해서 이순신이 막고 있는 한 무사히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가까운 곳에 있는 시마즈(사천성)에게 도움을 요청해 함께 탈출할 것을 계획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단 한 척의 일본 배도 본국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고 명나라는 지극히 당연하게도 끝나가는 남의 나라 전쟁에서 피해를 입고 싶어하지 않았다. 육지에서 왜성을 공격해 보았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명나라는 일본이 알아서 본국으로 돌아간다니 그대로 돌려보내주고 싶었을 것이다. 순천에 갇혀 독 안에 든 쥐였던 고니시 부대는 살기 위해 마지막 계략을 세우고 사천성으로 연락병을 보내는 데 성공한다. 이를 허락한 사람이 진린이다. 사실 노량해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전투였다. 그리고 명나라 진린의 안일한 행동에 의해 벌어진 노량해전인데 거기서 이순신이 진린을 구하느라 무리하게 적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사망하고 말았다. 6.25도 미국이 한국을 에치슨 라인에서 배제했고 이에 발맞춰 소련과 중국의 허락이 있었기에 벌어졌듯 우리나라는 외세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

 

어쨌든 고니시의 연락선이 뒤늦게 추격한 조선수군을 따돌리고 사천에 도착해서 대규모 협공이 성사되었다. 

 

드디어 그 유명한 노량해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연락선이 사천으로 간 후 4일이 되자 이순신은 대규모 일본군이 밀려올 것이니 전투를 대비하자고 진린에게 말했다. 그러나 진린은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았다. 진린을 뭐라 할수도 없다. 누가 남의 나라 전쟁에 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겠는가?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순신이 명나라 진린에게 눈물을 흘리며 함께 전투에 임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진린은 이순신의 간곡한 부탁과 진심에 마음이 바뀌어 함께 출정을 하게 되었다.

 

 

조선의 판옥선이 가장 우수했고 이순신은 명에게 판옥선 2척을 선사했 진린과 등자룡은 이 판옥선을 타고 노량해전에 참전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는 조선 수군이 노량을 막지 않고 순천에서 출정하기로 한 고니시부대를 막으려고 한다고 판단하고 신속히 노량을 통과하기로 결정했다. 시마즈의 생각대로 노량해협에는 조선수군이 없었다. 그러나 순천 쪽으로 가는 길목을 조선 수군 2부대와 명군이 가로막고 있었다. 1차 해전에서 밀리자 아래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나 대도섬 아래에는 조선 수군 1부대가 협공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 협공에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이 도주를 선택했으나 관음포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 

  협공을 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고니시는 위장함대에 속아서 출정을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빨리 출정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다. 시마즈 부대는 독안에 든 쥐, 그러나 물러설 곳이 없었던 일본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들었다. 약한 명나라 수군 쪽을 집중 공격해서 관음포를 벗어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때 등자룡의 배가 어이없게도 아군의 포에 불이 났고 진린 역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진다. 이렇게 명나라 수군 쪽이 무너지자 일본 수군은 관음포를 빠져나가 조선군의 후방을 공격, 그야말로 난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순신의 대장선도 이 난전에 휘말렸고 이순신은 이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할 수 없어서 직접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최선을 다했다. 그때 총알이 이순신을 관통하게 된 것이다.

시마즈는 이 틈을 이용해 관음포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고니시 역시 패배하고 있는 전투에 굳이 참전하지 않고 부산포로 도주하였다.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조선 수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추격했을 것이며 이들이 도주한 곳 앞바다를 가로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이 전사하자 그 누구도 추격을 명하지 않았고 명할 사람도 없었다.

   

  조선의 길과 성들, 그리고 조선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이들이 살아 돌아간다면 언제든 다시 쳐들어 왔을 때 큰 위협이 될 것이기에 단 한 명도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 이순신... 게다가 조선 땅을 유린하며 엄청난 백성을 죽인 일본군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이순신... 그의 꿈은 노량에서 멈추고 말았다.

더 가슴아픈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순신의 생각을 이어받을 그 누구도 조선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조선을 구한 영웅 이순신이 죽자 일본군은 편안하게 본국으로 돌아갔다. 

 

명나라 진린이 연락선을 사천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진린이 위기에 빠졌을 때 이순신이 무리해서라도 구하러 가지 않았다면...

울산과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모두 수장시켜 버리는 최고의 대첩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랬다면 일본인들은 조선으로 떠난 군사 중 단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며 조선을 조금은 두려워하게 되지 않았을까? 

   이순신...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일본군이 아직 조선땅에 있는데 어찌 그리 했겠는가? 노량해전이 마지막 전투가 아니었는데....

  이순신이 죽었기에 마지막 전투가 된 것이지....

  오히려 이순신 한 명이 죽었다고 일본군을 그대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며 막아선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한 나라에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그리 없는가?

 

지금도 그러한가?

 

 

노량,

이순신 영화 중 가장 잘 만든 것 같다. 해전의 양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해 준 부분, 당시 사용한 각종 무기들도 고증을 잘해줬고... 배우들 연기도 좋았고.... 2시간이 넘는 영화였지만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이순신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할 수 있게 해 준 영화였다.

훌륭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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