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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리뷰

하얼빈/ 현빈 - 안중근 , 우민호 감독

by onyuan 2025.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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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영화가 한 편 나왔다.

바위처럼 묵직하고 얼음덩어리 같은 차가움 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영화였다.

 

 

 

 우민호 감독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사실 나도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라면 이렇게 묵직하게 그려지길 바랐다.

아무도 건드린 적 없는 영웅,,, 안중근...

개인적인 의견으로 지난번에 개봉했던,,, "영웅"은 사실 아쉬움이 너무 컸었다. 

아직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영웅의 첫 영화가... 

 

우민호 감독도 영웅을 보고 아쉬워서 하얼빈을 구상했을까? ^^

 

 

 

  이번에 하얼빈을 보면서 안중근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 궁금했기 때문...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안중근이 재판을 받을 때 멋지게 변론했던 내용이 꼭 들어가길 바랐는데... 

그리고 옥중에서 일본군인들조차 존경심을 가진 내용...

 

안중근이라는 사람이 어떤 생각과 사상, 철학을 가지고 삶을 임했는지... 잘 표현되었다면...

감동은 10배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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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 궁금해서 공부를 좀 해봤다.

각종 논문까지 다 찾아본 것은 아니고 ^^ 뭐,,, 이걸로 학위 받을 것도 아닌데...

 

안중근은 우선 조선시대 향리 가문 즉 집권층, 양반집안의 후손이었다. 순흥 안 씨...

점 7개를 가지고 태어난 그는 안응칠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나 놀러 다니고 사냥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아버지 안태훈은 무거울 중에 뿌리 근자를 쓴 이름으로 바꿔 공부해서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럼에도 안중근은 냐냥을 좋아하고 학문에는 별로 힘쓰지 않았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1894년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동학농민운동 때 안태훈은 개인적으로 양성하던 사병들과 동학군을 토벌하였고 안중근도 참전했다. 양반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까?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안중근 집안은 당시 조선에 널리 퍼진 천주교를 믿었고 안중근은 신학까지 배웠다. 이때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아 도마 안중근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안중근은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상하이까지 갔다가 실망만 하고 돌아왔다. 이 무렵 아버지 안태훈이 사망하였다. 재산이 어느 정도는 있어서 석탄회사를 차리고 사업을 했지만 잘 안 되고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 학교를 인수했다. 이때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 일본은 고종이 헤이그 특사 파견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고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의병이 전국적으로 봉기했고 안중근도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해 대한의군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이 되었고 1908년 엄인섭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기습해 승리했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이 부분이 하얼빈 영화의 시작이었다. 실제로 안중근이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군 포로를 석방해 주었고 이후 기습을 받았다고 한다. 

  결과를 보면 안중근을 원망할 만하지만.... 정말 차원이 다른, 결이 다른 인물이었다고 판단되며 어쩌면 기독교(천주교)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중근이 천주교를 접하지 않았다면... 같은 민족인 동학군을 토벌하러 참전한 안중근이 우리 민족을 학살하고 핍박한 일본군을 살려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안중근의 선택 때문에 처참하게 죽은 독립군들의 명복을 빌며 기독교는 그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어떻게 책임질지 모르겠지만...

 

 1909년 살아남은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고 결의를 다진다. 자신의 결정으로 죽은 동지들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안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손가락까지 자르며 독립운동을 한 안중근, 대단하다고 여겼는데 그렇게 안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1909년 10월 26일 죽더라도 반드시 뭔가를 해내야 했던 안중근에게 기회가 왔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오게 된 것이다. 그를 찾아가서 죽이긴 어렵지만 찾아온 그를 죽이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동청철도의 출발지인 장춘, 관성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역 중 어디서 시도할지를 고민하였다. 4군데에서 연속적으로 암살을 시도한다면 확률이 높겠지만 인원과 자금이 부족해서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시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4명은 2팀(우덕순과 조도선, 안중근과 유동하)으로 나눠  채가구(우덕순과 조도선)와 하얼빈(안중근과 유동하)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고 마지막 기회를 하얼빈에서 노릴 수밖에 없었다.

밀정 이야기는 재미를 위해 넣었던 것일까? 아니면 새롭게 밝혀진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일까?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 도착했고 9시 30분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으며 이동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안중근은 어릴 적부터 즐겨했던 사냥실력을 발휘해 일곱 발의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에게 총격하였다. 그리고 가슴에서 태극기를 꺼내 "꼬레아 우라"를 3번 외쳤다.(대한독립 만세)

 

 이토 히로부미는 각성제를 한 모금 마신 후 "조선인의 짓인가?"라고 물었다고 하며 그렇다고 하니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말하고 죽었다고 한다.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사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이 조롱하기 위해 각색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다른 기록에는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 누구냐?"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히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 포로로 끌려온 조선의 왕족들을 잘 대해주는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고 하니...

  뭐 어쨌든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을 만큼 잔혹한 명령을 내린 것이 일본의 지도자들이었고 그중 한 명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 당시 인간의 잔인성을 보여준 일본의 지도자들과 그 명령을 목숨처럼 따랐던 일본인들은 용서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안중근은 영화에서처럼 곧바로 체포되었고 1차 조사를 받은 후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준비했지만 일본은 그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뤼순 감옥으로 옮기고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3월 26일 처형한 후 시체를 찾지 못하도록 처리해 버렸다. 함께 거사를 준비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사형받은 안중근과 너무 큰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교과서나 각종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

일본군에 잡혔을 때 남겨진 사진을 왜 그렇게 담았을까?

고문에 의해 얼굴도... 심리적으로도 위축되어 있는 것이 보이는 사진을....

 

 

  안중근,,, 아주 위풍당당해 보이고 자신감 넘쳐 보이는 사진도 있으니

앞으로는 안중근의 기세가 느껴지는 사진들로 바뀌길 바라본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


첫 번째, 명성황후 시해한 죄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정미 7 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네 번째, 고종황제 폐위시킨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안중근의 유언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유지를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 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3월 26일 마지막 유언-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월 24일 뤼순 지방 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안은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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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인가요? 이 근원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한 인류...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양을 도는 아주 작은 우주 별, 지구에 태어난 우리. 그 사는 이야기, 또는 삶을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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