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쇼펜하우어의 인식론
1) 칸트의 영향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제시한 인식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유럽 전역에 칸트의 영향력 퍼져 있었으며 칸트의 인식론이 그 정도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시간과 공간을 감성의 형식으로 규정하면서 우리의 세계 경험이 이러한 감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 앞에 존재하는 세계는 바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의 감각이 파악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너무나 명확하고 부인할 수 없는 정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감성과 오성은 인간의 인식능력의 두 가지 더듬이 역할을 감당하는데 칸트는 현상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한 것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표상의 세계로 제한합니다. 칸트가 현상 세계의 인식을 보편타당한 인식으로 규정하면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반면 쇼펜하우어는 표상 세계의 인식이 세계에 대한 단편적인 인식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차이를 보인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는 오성의 능력을 인간에게만 특별하게 적용하는 칸트와는 달리 쇼펜하우어는 동물들에게도 오성의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만이 원인과 결과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도 인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인간처럼 개념을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사물들의 다양한 작용 사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칸트와 구별되는 것은 이성의 역할을 제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성의 역할과 이성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두뇌 현상일 뿐이며 이중 오성은 표상 세계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제공하는 반면 이성은 추상적인 인식을 가져온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이성의 기능을 칸트보다 제한한 것은 니체도 동의해서 같은 입장을 펼쳤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의 올바른 사용과 역할, 그리고 그 한계를 논의했지만 이성의 기원과 존재 방식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들은 제기하지 않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것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 이성의 기원이 의지의 객관화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몸의 일부분인 두뇌의 작용 정도로 해석하였습니다. 이성을 신이 준 선물, 능력, 완전한 세계와의 연결 통로로 보았던 과거와 달리 의지가 이성을 조정하며 의욕을 드러내는 의지에 의해 이성이 생겨난다고 하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철학 위에서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첨부하였고 칸트의 철학을 벗어나 전혀 다른 사상을 펼친 것이 아니었기에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이해하려면 칸트를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형태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충분근거율을 언급합니다. 그는 박사학위논문에서 표상들을 결합하는 원리로써의 충분근거율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였고 모든 학문의 기초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발생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는 플라톤의 사상을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5권 1장에서도 이론적 방식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이론적인 것과 관련 있는 모든 지식은 이유와 원칙에 관련된 것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지를 묻는 충분근거율을 모든 학문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실과 왜 그것이 있는지에 대한 인식을 구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따릅니다. 쇼펜하우어는 서양철학의 역사는 인식근거와 원인의 혼동의 역사였다고 할 만큼 이 부분을 핵심으로 파악했습니다. 또한 흄이 인과 법칙이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인과성을 만들어 낸다고 한 것에 주목하였고 그의 주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들이 인식 근거와 원인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으면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으며 충분근거율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 대해서 "왜?"라고 물을 권리를 제공해 주며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라고 하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충분근거율의 형태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첫 번째 생성의 근거율, 두 번째 인식의 근거율, 세 번째 존재의 근거율, 네 번째로는 행위의 근거율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생성의 근거율은 인과 법칙으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외적 경험의 대상들의 변화에 대한 진자시계라고 말했습니다. 최초의 원인은 공간이나 시간이 끝나는 곳 어딘가, 혹은 우리가 인식하는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그 어딘가에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최초의 원인은 우리의 인식밖에 있기에 최초의 원인을 인간에게 설명하려는 것이 모순이며 그런 철학자들을 비판합니다. 두 번째로 인식 근거율은 하나의 판단은 충분한 근거를 가진다는 원리입니다. 이것은 간단한데 하나의 판단이 다른 경험과 논리,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원리입니다. 어떤 것을 판단하려면 반드시 기준이 되는 무언가의 경험이나 논리, 판단기준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존재의 근거율은 공간과 시간이 표상들의 존재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공간은 표상들의 위치 파악을 가능하게 하며 시간은 표상들의 관계를 순서대로 파악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표상들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위의 근거율은 인간의 다양한 행위들의 근거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인과 법칙이 바로 행위의 근거율인 것입니다. 인간은 동기가 있어야 행동하며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으로 주어진 세계, 즉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만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주장입니다.
3) 표상으로서의 세계
우리가 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근거율에 의해서 파악된 표상의 세계입니다. 쇼펜하우어는 표상을 객관과 같은 말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표상의 세계는 객관적인 세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주관적으로 느끼지만 주관적으로 느끼는 세계는 객관적인 세계를 경험하면서 인식되기에 우리가 느끼는 모든 세계는 객관적 세계, 즉 표상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인식하면서도 어느 것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는 것이 주관이며 존재하는 것은 항상 주관에 의해서만 인식됩니다. 그러나 표상 세계는 한 개인의 주관적 인식에 의한 인식과 객관적 표상에 의한 세계도 실재하기에 서로 각각의 의미를 가지면서 공존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에서 끊임없는 논쟁거리인 경험하지 못하는 외부세계, 인식되지 않는 외부세계, 증명할 수 없는 외부세계에 대한 논란, 외부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논쟁은 이성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외부세계에 대한 논쟁은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과 같이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성 때문에 쉽지 않으며 그렇기에 외부세계, 즉 증명할 수 없으며 객관적으로 인식되지 세계에 대한 논의를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이 확인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주관적인 주장을 서로 펼쳐봐야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객관화가 가능한 실재에 집중하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수없이 다양한 주장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외부세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선택만이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4) 추상적 인식과 직관적 인식
쇼펜하우어는 인식의 대상을 객관적 세계, 즉 표상의 세계라는 점을 강조하며 추상적 인식과 직관적 인식 두 가지 인식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추상적 인식은 이성에 의해 작용하는데 이성은 오성에 의해 주어지는 인식입니다. 이성은 추상적인 인식을 만들고 오성은 직관적인 인식을 만들어 냅니다. 이때 인식이 지속적이고 복잡한 경우 추상적으로 인식합니다. 이에 반해 직관적 인식은 정확하고 섬세한 인식이기에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게 도와줍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두 인식은 서로가 보완하는 관계이지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추상적 개념이 전체적으로 다양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직관적인 인식이 치밀함과 섬세한 인식을 제공하여 표상의 세계를 인식하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칸트 역시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고 지적하였기에 쇼펜하우어가 여전히 칸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이성과 학문의 한계
쇼펜하우어는 전통철학이 제시한 이성의 역할을 비판하면서 이성의 역할과 오성의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였습니다. 학문이 인식의 확실성 자체를 보증하거나 증명하지 않는다고도 하였는데 이는 학문이 개념을 결합하여 지식을 제공하지만 모든 학문의 증명은 거슬러 올라가면 직관적인 것, 즉 더 이상 증명될 수 없는 것에 부딪히고 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성에 의한 추론, 추측은 항상 오류를 동반하며 오류의 가능성은 학문의 역할에도 오류를 제공합니다. 또한 오성 역시 대상을 잘못 인식하여 가상을 만들어 내기에 학문의 확실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통찰력 있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직접 관찰하고 경험했다고 하는 사실들이 명제화 되고 개념화되어 학문으로서 정착해 교육되었던 것들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객관적 세계, 표상의 세계와 달랐음이 드러났습니까? 지금도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정보들, 믿고 있는 사실들이 미래에 얼마나 바뀔지 모릅니다.
쇼펜하우어는 학문의 역할과 한계를 분명하게 제시하며 모든 학문은 단시 표상의 학문일 뿐 절대적 진리를 가지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학문과 철학의 역할을 구분하여 말합니다. 어떤 것도 아는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 확신하지 않는 철학, 학문이 전제로 삼고 그 설명의 근거로 삼으며 한계로 설정하는 것이야말로 철학 본래의 문제이며 학문이 끝나는 곳에서 철학이 역할을 합니다.
2. 니체의 인식론
1) 인식과 학문비판
니체는 비극의 정신을 통해서 진정한 진리, 즉 존재의 불합리와 공포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실존의 진리를 우리에게 제시하려고 하였습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그리스비극의 의미를 비합리적으로 평가했고 플라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비극에 대한 오해가 서양의 사유 전체를 데카당스에 빠트려 비극의 진정한 본질을 외면한 채 인간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통찰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게 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학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니체는 정말 당차고 간결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책에 담아냈습니다. "그렇다, 모든 학문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존재하는가? 진리에 대한 하나의 멋진 정당방위인가? 비겁함과 거짓과 같은 것은 아닌가?"
니체는 학문과 인식은 세계의 본질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만을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숱한 개념들은 관조로부터 추상화된 형식, 껍질만을 가진 추상적인 것에 불과한데 이러한 학문 비판은 인식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니체는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 보며 보고 싶어 하는 것만 인식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특징과 모든 것을 개념화 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물 자체가 표현되었다기 보다 인간이 자의에 의해 개념화 한 것이라고 합니다. 니체의 이러한 통찰력과 문장력은 심장을 쾅쾅 두드리는 느낌마저 듭니다.
니체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왜 인간은 어떤 것을 인식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인식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익숙하지 않은 것, 낯선 것을 의심스러워하고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인간은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비극이며 이 비극 앞에 진실된 모습으로 나아가 우리를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학문의 대상과 학문의 개념은 인간화된 어떤 것이지 사물 자체는 아니기에 진리는 사물의 본질이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인간의 인식에 대한 한계와 인식이 낳는 오류들, 이런 인식을 통해 진리라고 짜깁기 되는 학문을 니체는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2) 관점주의
니체는 세계에 대한 획일적인 인식은 불가능하며 다양한 관점에 따라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입장을 펼쳤는데 이것이 바로 니체의 관점주의입니다. 이러한 니체의 관점주의는 전통 철학의 전제들을 해체합니다. 여기서 니체가 관점주의를 통해서 바라보는 세계는 플라톤의 이데아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입니다.
세계에 대한 인식은 각자의 삶을 표현하는 관점에서 시작되며 인식의 출발점은 결국 각자의 삶의 방식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근대철학에서 안다는 것에 대한 확신과 단정 짓는 것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였습니다. 니체는 칸트의 보편타당한 인식과 데카르트의 명석판명한 앎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고정된 세계가 아니기에 특정한 관점으로 파악하여 확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니체는 인간과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데 이 점을 망각한 채 무의식 중에 불변하는 대상으로 간주해 버려 특정한 관점으로 규정지으려고 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합니다.
니체의 관점주의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으니 우리는 끊임없이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과 누군가의 관점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역동적으로 세계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하라는 니체의 말에는 진지한 당부의 마음이 담긴 것 같습니다. 제임스 웹을 통해 지금껏 보지 못한, 인식하지 못한 우주를 보고 있는 지금의 우리, 정말 끊임없이 경험해서 우리의 뜻대로 대상들을 규정하지 말고 그 대상 그대로를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가장 위험한 것이 편협과 편견이라고 했던가요? 우리가 살아오면서 배우게 된 모든 것들, 확신하는 모든 것들, 자유롭게 벗어나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유연함을 가져야 할 것만 같습니다.
3) 해석으로서의 세계
니체의 인식론은 전통 철학이 왜곡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해 줍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이미 확정된, 완결된 것으로 전제하거나 궁극적인 완성의 단계로 이끌어 가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하였습니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수없이 다양한 해석만이 존재하는 전통 철학의 고정된 세계관을 해체한 니체. 모든 가치와 이 세계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기여해야 하는 것으로 재해석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신의 죽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해석은 주어진 것, 주어진 세계에 대한 수동적인 순응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도전정신은 정말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해 주는 느낌입니다. 니체는 해석된 세계는 바로 인간의 삶이 나타난 것이며 이렇게 해석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어야 하며 그 주체자는 누가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종교, 도덕, 세계를 넘어 자신의 내면까지도 깊이 들여다보고 끊임없이 다양하게 해석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닐까요?
4) 언어의 기원과 세계 경험
니체는 리츨교수를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일까? 언어의 기원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언어의 역할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유럽 사회였기에 언어의 기원을 설명한 구약성서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언어는 인간이 사물과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며 자연스러운 인간의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언어의 탄생은 사물들에 대한 인간화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물이든 이름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각각의 언어로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 인식하기 좋게 만들고 소통하기 편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언어의 발생 기원에 대한 논의를 통해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신화적인 요소들이 얽혀 있는 것을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언어의 탈마법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당시 사람들을 질식시키듯 꽉 조였던 종교적 전통과 그의 하수인 역할을 감당했던 철학을 언어의 기원을 통해 해체하길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자유롭기를 원했던 니체, 그의 용기 있는 저항을 깊이 돌아보며 인식론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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