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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리뷰

쇼펜하우어 VS 니체(1장): 쇼펜하우어의 생애, 니체의 생애

by onyuan 202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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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 책은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비교하는 도서입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삶의 철학을 정초 하면서 인간의 유한한 삶이 지닌 다양한 의미들을 밝혀내려고 노력한 철학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 의지라고 주장하면서 독창적인 의지의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두 철학자는 영혼과 육체,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 같은 개념들을 대립시키고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전통 철학을 맹렬하게 비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둘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친 부분도 있지만 의지가 지닌 인식론적-존재론적 의미 그리고 형이상학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서로의 긴밀한 연관성을 우리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철학자를 함께 담아낸 이 책은 의미가 있으며 그들의 중심사상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의 첫 걸음은 역시 그의 삶을 조명해 보는 것일 겁니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성장하며 경험한 환경과 사건들로 인해 생각과 행동이 인생에 담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간절한 몸부림으로 꽃을 피우는 존재이기에 이들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 보고 그들의 사상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쇼펜하우어의 생애

  우선 쇼펜하우어의 생애를 보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니체보다 반세기(56년)나 앞선 세대를 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1788년 2월 22일 단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는 폴란드의 그단스크라는 지역입니다. 아버지는 무역을 하는 상인이셨고 어머니는 문필가로 활동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아버지의 일의 특성상 항구도시인 함부르크로 이사를 하였고 4년 아래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고 2시간 거리에 있는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2년 정도 지내다가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아들과 여행도 하면서 무역사업의 일을 본 것 같습니다. 함부르크에 돌아온 쇼펜하우어는 룽게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가족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며 다양한 경험을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가정은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립학교를 다니고 유럽 여행을 한다는 것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런 것 같기는 합니다.  

  1805년 쇼펜하우어가 17세가 되던 해 유럽여행을 하며 유능한 상인들을 만나고 배우며 무역의 가업을 이어받는 과정을 잘 수행하고 있던 순간, 아버지가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청소년 시기, 가장 든든한 나무와 같은 존재가 그의 곁을 갑자기 떠난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고뇌에 빠지게 되고 어머니와도 많은 갈등을 겪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어본 경험이 없다면 그의 충격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가정을 부유함 속에서 잘 돌보시고 자녀들의 앞날을 열어주실 분과 갑자기 영원한 이별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슬픔과 충격 중 가장 높은 레벨에 있는 것일 겁니다. 이 경험이 아마도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후 어머니는 바이마르로 이사해서 문학 살롱을 열어 저명인사들과 교류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괴테와 교류하게 되는데 괴테는 쇼펜하우어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시기 어머니는 쇼펜하우어에게 또 하나의 영향을 주었는데 문학 살롱을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사교적인 삶을 살았고 쇼펜하우어에게 이 모습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갈등을 낳았고 결국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삶을 보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인간의 본성과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계속 학업에 매진하여 1809년 괴팅겐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학과 자연과학, 철학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스승 슐체의 권유로 플라톤 철학과 칸트철학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큰 시련을 겪은 그는 또래들에 비해 인생에 대해 깊은 사고를 했을 것이고 그런 그의 사유함의 결실이 철학에 두각을 나타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철학자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피히테였습니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1811년 가을 베를린 대학으로 옮기게 되었고 자아의 역동적인 행위에 근거하여 세계를 해석하는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이 혼란스러운 세계를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베를린에서 또 한 명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도 듣게 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그는 학업에 열중하다 1813년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루돌슈타트로 이주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독일 전역뿐 아니라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어서 할 수 없이 떠났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이라 어머니가 계신 바이마르로 갔었는데 삶에 대한 가치관 차이만을 크게 느끼고 홀로 루돌슈타트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박사논문 "충분증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하고 예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이후 1818년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하여 1819년 1월 출판하였습니다. 이 글들로 1820년 베를린대학에서 교수자격 논문을 통과하여 강사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교수자격 심사 때 헤겔이 참석하여 질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았지만 그의 강의는 인기가 적었습니다. 학생들이 원하는 강의가 아니었기에 외면받았고 결국 1833년에 콜레라가 베를린을 덮치자 프랑크푸르트로 떠나 정착하여 마지막 삶을 살다가 1860년에 사망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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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가 베를린대학에서 인기가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헤겔, 피히테, 셸링 등을 칸트의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강력히 비판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베를린대학을 떠나 마지막 삶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낸 이유를 찾아보자면 대학 강의에서 헤겔과 충돌한 후 대학교수들의 파벌을 경멸하여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단체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학교 밖에서 줄곧 독자 연구 활동을 지속하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1820년 대에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힌두교와 불교에 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종교들의 핵심교리 속에 자신과 칸트가 도달한 결론과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종교학, 종교철학을 연구하게 된 셈이며 동양의 사상을 접하면서 더욱 넓고 깊게 사유할 수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먼 과거의 동양 사상가들이 서양과는 전혀 다른 환경, 언어, 문화 속에서 근대적인 서양철학의 과제에 대해서 같은 결론을 말한다는 것은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발견을 쇼펜하우어는 글로 써서 남겼고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 철학의 세련된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 간의 유사성을 말한 철학자이자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표명한 독창적인 철학자로 손꼽힙니다. 어떤 학문이든 한 분야에서 두각을 보일 만큼 깊이 연구하고 공부한 학자라면 불가지론, 무신론을 선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솔직한 인간의 본모습이 아닐까요?

  어쨌뜬 그는 이러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여록과 보유>라는 인생 전반에 관한 수필이 담긴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이 쇼펜하우어를 유명 인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서적들은 주장이 굉장히 명쾌한 특징이 있습니다. 동시대 인기 철학자인 헤겔과 비교했을 때 헤겔은 현학적인 문장으로 읽는 사람을 난해하게 하는 반면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명료하고 간결했으며 오해의 소지가 적습니다. 인간과 삶에 대한 고뇌로 평생을 보낸 쇼펜하우어, 그가 남긴 유산을 통해 우리의 삶을 좀 더 명료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2. 니체의 생애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뤼첸 근처에 있는 뢰켄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고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니체는1846년에 태어났고, 뒤를 이어 남동생인 루드비히 요셉이 1848년에 태어났습니다. 쇼펜하우어와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되는 니체, 그의 아버지 역시 뇌 질환으로 184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1년 후 또 한 번의 충격을 받게 되는데 바로 그의 어린 남동생은 1850년에 죽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니체의 할머니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아버지의 결혼하지 않은 두 자매, 두 하녀들과 함께 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쇼펜하우어처럼 청소년 시기는 아니었지만 5세 6세 때의 이 기억은 평생 그의 마음속에 슬픔으로 깊이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성장하면서 더욱 크게 솟아올랐을 겁니다. 

  그 아픔을 뒤로하고 그는 12세에 "악의 근원에 대하여"를 집필하는 소질을 발휘했으며 엘리트 학교로 유명했는 슐포르타 입학시험에도 합격하였습니다.  그 학교에서 파울 도이센과 친한 사이가 되어 1912년 쇼펜하우어학회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파울 도이센은 우파니샤드 같은 인도 경전을 연구했고 1887년에 베를린대학교, 1889년에 킬 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인물입니다. 파울 도이센은 쇼펜하우어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았고 평생 쇼펜하우어를 연구한 인물입니다.

  1864년, 니체는 본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전공하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는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 대학 한 학기 후에 어머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했고, 신앙인으로서의 삶도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1835~1836년에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s)란 책에서 그가 담당한 부분을 읽어나가던 중에, 책의 내용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1867년 10월 니체는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그는 나움부르크에서 프로이센 포병으로 한 해 동안 복무하였는데 1868년 3월에 말을 타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가슴을 심하게 다쳐 군 복무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군복무를 5년 이상 하였고, 높은 직위에도 올랐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군복무를 마치게 된 니체는 본 대학에서 만났던 고전문헌학 교수인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 공부를 계속하게 됩니다. 그때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고 매료되어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이성의 역할을 비판하면서 세계의 본질을 의지로써 파악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니체의 사상 전개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바그너와 만나 교류하게 되었는데 그의 음악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지만 바그너가 지나치게 기독교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였고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지는 것을 보고는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1869년 리츨 교수의 도움을 받아 바젤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어 교단에 섰으며 여러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약해지면서 그의 삶은 병과의 사투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보내게 됩니다. 니체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킨 후 완전히 정신 상실자가 되었고, 이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예나에서 거주했습니다. 니체는 자신을 보살펴 주시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다행히도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니체를 바이마르로 옮겨 돌보았고,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죽었습니다. 니체가 죽자 엘리자베트는 고향 뢰켄의 아버지 묘 옆에 니체를 안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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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의 생애에서도 빠진 부분을 첨부하였습니다. 니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니체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이름이 불리고 있지만 재능 있었던 한 사람이었고 인간과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인간 중에 엄청난 지혜와 힘을 가진 누군가가 나타나 모든 것을 알려주고 해결해 주길 기대하지만 그저 한 인간일 뿐입니다. 영웅을 기대하고 영웅을 만들지만 우리가 영웅이라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니체의 삶은 그 시대를 산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에게 애정을 가지는 이유는 분명 그는 인간의 한계 안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인간 중에서는 제법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었으며 사고력과 통찰력, 판단력에서 남들과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의 대물림을 받아들이며 삽니다. 부모와 사회가 이슬람이면 나도 이슬람, 불교면 나도 불교, 기독교면 나도 기독교... 운명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력과 사고력으로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탁월한 힘을 가지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니체는 충분히 주목할 만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 철학의 자유... 생각의 자유는 결국 우리 인생을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하는 근원입니다. 이것을 삶으로 보여준 니체, 그의 마지막 삶은 참으로 안타까웠지만 그가 보여준 의지와 세상을 이해하고 인간을 해석하는 통찰력,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이들의 철학적 사상을 돌아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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