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군전투 후 손권과 유비의 관계는 멀어지고
형주의 관할권 문제를 놓고 심각한 군사적 충돌까지 갈 만큼 갈등이 심해졌다.
손권은 적벽대전의 공로를 내세우며 형주전체에 대한 권한을 오나라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유비는 적벽대전은 공동작전으로 승리한 것이며 형주의 남부는 순수하게 촉의 힘으로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갈등이 커져 둘 모두에게 손실이 갈 것을 우려하여
유비는 형주의 동쪽인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주고
자신은 서쪽, 남군과 무릉, 영릉을 지배하였다.
이렇게 갈드의 문제는 일단락 되었지만....
219년 유비는 위나라의 한중을 공격하기 위해 관우를 출정시켰다.
그런데 손권이 이 때가 형주를 차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보고 유비의 영역을 공격하였다.
관우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돌렸지만 손권은 조조와 힘을 모아 관우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관우는 생포되어 손권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관우의 죽음은 유비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제갈량과 충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직접 오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조자룡 역시 오나라는 위나라를 정복하면 자연히 무너질 것이니 우리는 우선 오나라에 집중해야 한다고 설득하였지만 유비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전투에서 장비가 범가와 장달에게 암살당하고 이들은 장비의 목을 가지고 손권에게 투항하였다.
유비는 너무나 큰 충격에 휩싸였고 냉정한 판단보다는 감정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손권은 유비가 공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위나라 황제 조비에게 신종하였다. 조비는 손권에게 오나라 왕으로 정식 임명하기까지 하였다.
221년 드디어 유비는 제갈량에게 촉의 수도였던 성도를 지키게 하고 조자룡에게 강주를 맡긴후
직접 오나라를 공격하러 갔다.
처음에는 파동, 무현, 자귀까지 순식간에 함락하면서 진군하였다.
자귀에 본진을 두고 이릉전투를 앞두었다.
222년 봄 자귀에서 유비는 해전에 강한 오나라를 의식하여 육로로 이동하였고
이를 기다린 육손의 5만 군사는 오나라와 촉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을 시작하였다.
육손은 험난한 산지역을 내주면서 계속 후퇴만 하다가 이릉에 이르러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6월까지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유비 군대는 무더위를 피해 울창한 숲 속에 주둔하였다.
이를 포착한 육손은 화공작전을 펼치며 우왕좌왕하는 유비의 군대를 격파해 나갔다.
유비는 파동에 있는 백제성까지 후퇴하였고 다시는 형주의 오나라를 공격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형제들의 죽음과 자신의 패전으로 인한 자책감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223년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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