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와 조자룡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유비군은
한진에서의 전투에서도 지게 된다.
그리하여 한진에서 한수(강)를 이용하여 하구로 이동하였다.
조조군대는 한수를 따라 유비군을 쫓지 않고 강릉으로 내려가서 장강을 타고 적벽으로 올라갔다.
조조는 적벽 가까이에 주둔하고 있던 손권에게 항복을 압박하였다.
손권과 주유가 항복한다면 유비군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할 수 있었기에 이들을 설득하였다.
제갈량은 주유를 만나 "모래 속에 묻힌 부러진 창끝이 아직도 녹슬지 않았기에 녹을 닦고 씻어 보니 전왕조의 것이었네. 동풍이 주랑의 편이 아니었다면 봄이 무르익은 동작대로 이교(대교와 소교)가 잡혀갔겠지."
조조가 손권의 형 손책의 아내 대교와 주유의 아내 소교를 탐하고 있다고 하자 주유가 화가 치밀어 손권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권면하였다. 그리하여 유비와 손권은 연합하였다.
조조군대는 적벽의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군대의 열세였던 유비군대는 작전에 골몰하였다.
주유는 우선 조조군의 수전 사령관이었던 채모와 장윤을 반간계를 써서 제거하였다.
조조군의 장간이 손권에게 항복을 회유하러 왔는데 주유가 거짓으로 술에 취한 척하며 채모와 장윤이 조조를 배신한다는 거짓 편지를 장간이 훔치도록 유도하였다. 주유의 작전대로 장간은 이 편지를 조조에게 바쳤고 조조는 채모와 장윤을 참수하였다.
조조 20만 (조인/ 채모/ 장윤/ 장간/ 채화) VS 유비와 손권 합군 5만 (제갈량/ 주유/ 노숙/ 황개/ 방통)
주유는 제갈량에게 화살 10만 개가 필요하다고 부탁하자 제갈량은 배 20척만 빌려주시면 3일 안에 된다고 장담하였다.
제갈량은 안개가 자욱한 날 강에 배를 띄우고 짚을 사람의 모양으로 쌓아 적에게 접근시키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그 이유는 조조군대가 적으로 오인하고 화살을 쏘게 하여 수 만 개의 화살을 모아 적군의 군사무기를 무력화시키고 아군에게는 많은 군사물자를 충당하려는 것이었다.
주유는 처음에는 위험하게 판단하여 반대하려 하였으나 제갈량의 책략에 감탄하였다. 실제로 안개가 자욱한 날 배를 띄우고 조조의 군대 근처로 접근하여 풍악을 울리며 큰 소리를 내니 적의 습격으로 판단한 조조군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엄청난 화살을 발사하였다. 이리하여 제갈량은 배에 박힌 화살을 유유히 아군의 편으로 끌고 와서 무기를 조달하였다.
그리고 주유와 제갈량은 조조군대에 맞서는 책략을 서로 손에 써서 비교하였는데 둘 다 불화로 일치하였다.
그리고 손권의 책사 봉추라고 불리는 방통이 작전상 주유를 배반하고 조조에게 거짓 투항하였다.
방통은 조조에게 가서 병사 중 환자들이 많은 것을 간파하였다. 놀란 조조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냐고 묻자 자신은 이 지역에서 살아왔지만 조조군의 군사들 대부분은 땅에만 훈련을 받던 북쪽 사람들이기에 병이 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방통은 조조에게 수많은 배들을 쇠사슬로 엮어 놓으면 배가 흔들리지 않아서 육지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어서 훈련하면서 병이 나거나 배멀미에 시달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이에 조조는 기뻐하며 바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조조의 부하 서서가 이를 간파하였지만 유비와의 의리 때문에 이를 모른 척 해 준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되자 노장 황개가 또 한 번의 거짓 투항을 준비하였다. 일부러 곤장을 맞고 조조를 완벽하게 속이려는 계책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겨울이었기에 북서풍이 불고 있어서 화공술을 쓰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 제갈량은 3일 동안 동남풍을 일으켜 보겠다고 한다.
(실은 안개가 낀 후 며칠 뒤 동남풍이 분다는 것을 제갈량은 알았다. 기후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이 과거 역사에서는 엄청난 비밀이었으며 정확한 예측은 엄청난 기록과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었다.)
동남풍이 불자 황개는 엄청난 군량미를 싣고 밤에 투항하겠다고 조조에게 연락한 후 기름과 갈대를 가득싣고 강북으로 진격하였다.
황개의 신호에 20여 채의 배에 불을 붙이고 조조의 배에 충돌하였다. 불을 붙인 20여 채의 배 뒤에 불화살을 준비한 군사를 태운 배가 뒤따라 와 육지에 상륙한 후 조조의 진영에도 불화살을 쏘았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함대를 휘감았으며 조조의 진영 역시 불바다가 되었다.
조조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패잔병을 이끌고 화용도로 도주하였다.
* 조조 역시 화공에 대한 위험을 알았지만 조금은 자만한 것 같은 전투.
적벽대전은 삼국지 최고의 전투로 묘사되고 있는데 상당한 과장이 덧붙여져 있는 전투.
조조의 20만 대군에 대한 내용은 과장으로 보고 있다.
10만 대군을 이끌고 형주로 내려와 항복한 군대를 받아서 20만 명이 되지만
최초 조조의 군대는 풍토병으로 5만 정도 병이 걸리고 항복한 군대들은 충성도가 낮아서
실제로 조조의 군대라고 볼 수 있는 수는 매우 적었다.
제갈량을 천재, 요술장이 수준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적벽대전에서의 지략들은 지역 지리와 상황을 잘 아는 주유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제시되었을 가능성이 큼.
하지만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이 대패했다는 것 만큼은 사실인 것으로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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