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족과 함께 행복을

강화도의 모든 것(4): 역사의 발자취

by onyuan 2023. 2. 7.
반응형

강화도는 제주, 거제, 진도, 남해 다음으로 큰 섬이다.(5위)

거제와 진도, 남해, 강화도는 섬이라고 느껴지지 않지만.....(육지와 연결이 되어 있어서)

 

고조선의 단군이야기가 외딴 섬 강화도에 있는 것도 흥미롭다.

 

지리적으로 옛 한반도의 중심지의 관문 역할을 했던 강화도 잘 살펴보도록 하자. 

 

 

강화 전역에 고인돌이 많이 있다.

이것은 선사시대에 막강한 지배층을 형성했던 청동기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당시 해수면이 지금보다 낮아서 섬이 아니었을까?

 

전세계에 있는 고인돌의 상당수가 한반도에 밀집해 있는데...

강화도에까지...

 

고인돌 하나를 올리는데도 수천명의 사람들이 힘을 모았어야 했는데

강화도에 그 많은 인구가 살았을까?

고인돌을 어떻게 올렸느냐에 대한 추측이 다양한데 고성에 가면 아주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영상으로 제작해서 전체 과정을 보여준다-

(전문적인 연구는 도서관에서 논문을 좀 찾거나 역사연구자들의 도움이 필요해 보인다. 궁금하지만 참는다 ^^)

 

 

강화도는 삼국시대 때부터 주목받아왔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으로 해전과 육전의 요충지였고,

고구려는 일찍이 이곳에 '혈구군'을 설치하였다.

중국과 해상·육상 통로가 없었던 신라 역시 자주 이곳을 넘봤다.

누가 한강 유역을 먼저 확보하느냐가 삼국간의 최대 관건이었기에 강화도는 중요한 장소였다.

 

고려때에도 전세계를 호령했던 막강한 몽골군을 피해 끝까지 항전한 곳이 강화도 아닌가.

고려인들의 용맹함은 정말 대단했던 것 같다. 고려,고(구)려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였던 것일까?

몽골이 유일하게 한 나라로 인정해주고 멸망시키지 않은 나라... 고려...

삼별초의 기백 하나는 정말 대단했다.

그들이 제주도까지 갔다가 오키나와까지?

오키나와를 가니 고려인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몽골이 제주도까지 가서 섬멸하려 하자 오키나와까지 이주했다는 삼별초

원주민들과 잘 지내면서 많은 문화와 기술적 도움도 줬다는데...

정확한 자료는 없었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었다.

 

적들의 침략에 대비해 이 성벽을 쌓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전국 어디를 가도 산성이 있고 성벽들이 많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얕은 산이라도 배낭하나 짊어지면 힘든데...

저걸 옮긴다? 대부분 맨손으로 했을 시대에...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이 죽임을 당하거나 본인의 목숨이 걸려있으니

어떻게든 했겠지???

 

해안포... 북한의 서해안 해안포를 보는 것 같았다.

일렬로 포를 발사할 때 어땠을까?

포는 어디까지 날아갔으며 명중률은 ...

전쟁은 정말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이런 건 또 궁금하다.

자, 여기서 잠시 역사 공부 좀 하고 넘어가자.

 

1. 병인양요 (1866년)

프랑스의 일방적인 공격이라고 알고 있나요?

조선이 프랑스를 공격한 것은 아니지만 천주교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박해를 했습니다.

하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신앙은 신분사회의 조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죠.

이 때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 그리고 조선인 천주교도 8000명(무려)이 처형되는 병인박해가 있었습니다.

정말 어마무시했습니다.

역시 권력자들은 백성과 국민의 안위와 평화와 자유보다

자신들의 위치, 누리던 모든 것들이 더 중요합니다...

어떻게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 것도 아닌데.... 8000명을 ... 처형?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관심을 가질 기회로 삼고 정조대왕도 관심을 가지고

박해하지 않은 서학에 대해 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면...

일제시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를텐데...

그리고 어차피 세상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왕조시대는 막을 내렸는데... 양반들의 시대도...

 

어쨌든 이때 잡히지 않은 선교사 펠릭스 클레르 리델이 중국으로 탈출해서 이를 알렸고

나폴레옹 3세는 출병을 승인했습니다.

 

현재 어느 국가든 미국인을 9명 처형하면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뭐 그런 상황이 벌어진거죠...(바로 이런 상황이 신미양요였죠,,,)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군이 자국민의 처형에 반발하여 쳐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소문으로도 알고 있었고

심지어 제너럴셔먼호가 먼저 와서 알렸다는 것입니다.

준비를 잘 했다면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할 일은 없었을지는 모르겠네요... 

무기차이가 많이 났다고 하니... 강화도 군대가 준비하는 수준이 아니라

조선이 준비를 했다면 그래도 다르지 않았을까?

 

 

10월 로즈 사령과는 군함 7척 병사 1520명을 이끌고 조선에 도착.

프랑스는 선교사 학살을 비난하고 그 책임자를 엄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수호조약을 작성하라고 요구했고

당시 조선은 선교사 처형이 합법하고 프랑스 함대가 불법 침범했으니 퇴거하라고 맞섰습니다.

 

대화가 진척이 없자 압도적으로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서 10.16일 강화성 점령

10.26일 문수산성 점령하며 많은 문화재와 각종 유물들이 약탈되었습니다.

이때 '외규장각 의궤'도.... 

(2011년 반환은 아니고 대여... 사실상 영구적 대여이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프랑스...)

 

하지만 1520명의 병사로 강화도를 점령하고 조선과의 전쟁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양헌수 부대가 반격에 성공하고 어재연 부대가 격퇴하며 프랑스군은 물러갔습니다.

 

이 첫 번째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좀 더 지혜롭게 대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유럽의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고 현재 강대국들이 세계로 뻗어나가 식민지를 삼고 있는 상황들을

파악할 수 있지는 않았을지... 그리고 교전 중 압도적인 적의 무기에도 관심을 가지고 

우리도 대비를 할 방법을 찾았다면... 

 

 

2. 1871년 신미양요

 

병인양요가 있기 얼마 전 1866년 8월. 토마사 선교사는 조선이 선교하기 좋은 곳이라 여기고

제너럴셔먼호에 몸을 실어 꿈을 실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본인이 통역을 맡아 조선을 안내했죠.

 

그런데 조선은 청나라 이외의 어떤 국가와도 통상과 교역을 하지 않는 쇄국정책을 썼고

제너럴셔먼호는 정박하지 못한 채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수위가 낮아 배가 움지이지 못하게 되었고 

적대적인 조선군과 대치된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은 위기를 느끼고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제너럴셔먼호는 정복하거나 무력을 사용해서 통상과 교역을 시도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는데...

(1척의 배로 어떻게 그렇게 할 생각을...)

어쨌든 충돌했고 평양감사 박규수는 힘없는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몰살해 버렸습니다.

생포해서 그들과 대화를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은데...

배도 태울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포획해서 연구를 했어도...

거북선의 나라 조선이 왜 그런 조치를 내리지는 못하고...

외국인이라면 기겁을 하듯 다 태우고 몰살해 버렸다니... 

그냥 포위하고 시간만 끌어도 먹을 것이 떨어지고 상황이 불리함을 느끼면 

알아서 나와 항복했을텐데....

 

 

미국도 가만히 있지 않게 됩니다.

안그래도 남북전쟁도 마무리 되고 해외로 눈을 돌리던 시기였기에...

미국은 신중하게 2번 정찰을 한 후 군함 5척, 1230명의 군대를 준비해서 5월 16일 출정하게 됩니다.

미국은 처음부터 공격을 하지 않고 조선 대표단을 파견해 협상을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거부했고...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초지진을 초토화시키고 병인양요 때 활약했던 어재연의 부대도 전멸시킵니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하려고 하지 않고

통상과 교역을 요구했지만 흥성대원군의 조선은 쇄국양이정책을 앞세워 완강하게 거부...

조선을 포기하고 미국 함대는 철수하였습니다.

이때 미국과 소통했어도 늦지 않았을텐데.......

아~~~~~ 참 답답하네....

 

조선은 확실히 고려와는 다른 나라였다.

명나라를 모시고 그들에게 신하의 나라로서 예우를 갖춰야 한다는 명분으로 고집부리다가

누르하치, 청의 세상에 오는 것을 몰라서 초토화되고 백성들은 지옥을 경험했고

이번에는 청나라와의 관계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안위를 위해 고집을 부리다가...

 

조선은 나가사키와 같은 교역 항구도 없었고, 양반지도층은 여전히 서구문물에 어두웠기 때문에 개항은 곧 망국인 양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조선 개항의 관건을 쥐고 있는 청나라가 조선 개항을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개항하면 대조선종주권()이 상실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계속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조·청간의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하였다.

결국 위정척사사상에 젖어 있는 흥선대원군은 조·미전쟁 직후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양이와의 화친은 매국이요 망국행위라고 경계하였다.

 

 

3. 윤요호 사건 (조선의 멸망을 알리고 식민지의 시작을 알린 사건)

 미국이 철수를 하기는 했지만 세계 열강들이 빠르게 식민지를 넓혀가고 있는 상황에서

내전으로 늦게 합류한 미국의 마음은 조급했다.   

일본을 반 식민지로 삼고 있었던 미국... 1854년 일본도 미국과 일미조약을 통해 경제는 엉망이었고

나라로서의 위상이 무너져 있었다.

 

그때 제너럴셔먼호 소식 이후 미국이 통상을 실패하고 철수한 것을 잘 활용하려고 한다.

일본이 조선을 기회로 도약해보려고 한 것이다.

 

일본은 미국에 각서를 보낸다.

"조선이 이를 데 없는 무의망동을 벌려 미국인을 살해하니 우리 대군은 통탄하고 있다.

일본이 조미관계를 중재하여 미국 국기를 조선에 휘날리도록 하겠다"

미국의 복수를 해주겠다?

 

미국으로서는 나쁠 것이 없으니 일본의 침략 준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 미국의 조력이 있었다니....

해방이후 남북분단에도 미국의 역할이 컸고

6.25전쟁도 미국이 자국보호구역에서 한국을 제외하자마자 발발했는데...

이제보니 한국 아픔의 역사에 미국이 다 개입했네...

참... 이게 무슨 일인가...

 

일본은 조선의 서해안 탐사를 핑계로 윤요호를 보냈고

강화도 앞 난지도에 도착...

강화도를 점령까지는 아니지만 방화, 살육, 탈취를 일삼은 후 퇴각해 버렸습니다.

 

이후 다시 조선에 와서 수교통상을 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바로 이 시기에...

조선 정부는 대원군에서 실권이 민비에게로 넘어갔습니다.

민씨... 민가 일당은 정말 역대급 사대주의적 통치자들이었습니다.

일본에 강경하게 대응했던 대원군의 대일 정책을 바꿉니다.

왜냐하면 청나라가 일본과 타협하여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라는 편지를 보냈기에...

청나라 말을 들을 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조선의 왕실...

선조, 인조의 역사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안타까운 왕실...

청나라는 지금 열강들의 동네북인데....

 

청나라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에게 충성을 다하는데 익숙한 민가 일당은 청의 권고를 받아

불평등한 게 불을 부듯 훤한 강화도조약을 체결합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코미디인가?

 

그나마 괜찮았을 프랑스 미국과의 통상은 꽉 막힌 흥선대원군이 발로 다 차고

일본과의 통상도 막았던 흥선대원군이 좀 더 조선을 통치하지...

왜 민비로 넘어가자마자 일본과...

 

그것도 제일 악덕한 일본과....

 

잃어버렸다는 말로도 부족한 일본 식민지 시절의 36년.....

                                          

 

 

 

 

자연사박물관 - 역사박물관 - 고인돌 유적지는 한 곳에 몰려 있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충분한 넓이의 야외도 있어서 신나게 놀았다.

 

역사, 자연사 박물관은 어느 지역을 가나 대부분 있다.

그런데 규모나 볼거리가 비슷비슷하다....

서로 보고 참고해서 비슷하게 짓나?

 

 

강화도의 역사관련 장소, 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고 기억할 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커서 아빠가 늘 여행을 가면

박물관과 역사유적지를 함께 돌아봤다는 사실은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관심을 좀 더 가질 것이다.

역사는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주기에 결코 모르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는 이런 경험 때문일까? 역사책을 많이 본다..^^

 

반응형

댓글